티스토리 뷰

728x90
반응형
BIG

중국의 부상과 함께 동아시아가 개편되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 유럽과 함께 그동안 3강(triad power)을 형성했던 일본의 위세가 주춤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홍콩, 싱가포르, 한국이 금융을 새로운 성장엔진으로 키우기 위해 각축을 벌이고 있습니다. 중국의 체제적 특성으로 인해 개방성이 높은 국제금융 센터가 중국 내에 제대로 자리 잡을 때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에 앞서 지역의 금융 허브로서의 지위를 다지겠다는 발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주식 시장은 시가 총액기준으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이고 국제 시장의 규모도 매우 큽니다. 또 은행권의 대출이나 회사재 시장의 규모도 다른 동아시아 나라에 비해 월등히 큽니다.
그러나 도쿄 금융 시장은 국제화가 지체되고 있습니다. 태생부터 국제성을 띠었고 홍콩이나 싱가포르와 달리 도쿄 금융 시장은 국내적 금융 시장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도쿄 시장은 다른 시장과의 아비트라지가 충분히 작동하지 않고 있으며, 영미의 금융을 추격하겠다는 정치적 슬로건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국제화가 지체되어 있습니다.


1980년대 중 한때 일본의 약진이 뚜렷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당시 국제 금융 시장에서 유로엔(euroyen)의 이용이 화발해지고 엔화 표시 스와프 시장이 확대되자, 일본 은행들이 해외 대출 규모를 크게 키우면서 세계 랭킹 10권에 다수 진입했으며, 각국이 외환 보유고에서 엔화 비중을 높임으로써 엔화의 국제화가 급진전되는 형세를 보였습니다.

또 도쿄 금융 시장에서 파생상품 등 첨단 금융 기술에 대한 학습도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거품 붕괴와 부실 채권의 누증으로 일본경제가 장기 불황에 빠져들자, 일본 엔이나 도쿄 자본 시장의 역할이 위축되고 일본 은행들의 해외 시장 점유율도 급격히 하락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일본을 바라보는 해외의 시각이 변질되었습니다.

더 이상 도쿄를 세계 3대 국제 금융센터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엔캐리 트레이드(yen-carry trade)와 같은 찰나적인 아비트라지 이익을 거두는 데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에  도쿄 시장의 국제적 면모가 크게 후퇴했습니다. 도쿄증권거래소에 외국 가입의 수가 줄어들었고 외환 거래 규모가 늘지 않고 있으며 비거주자에 의한 엔화 표시 채권인 사무라이 본드(samurai bond)의 발행도 정체되었습니다.

이처럼 도쿄는 중국과 동아시아의 부상이라는 시대적 조건에서 이니셔티브를 상실하고 유리되어 있습니다.

 

 

 

 


엔캐리 트레이드


금리가 낮은 엔으로 돈을 빌려 수익률이 높은 다른 통화의 자산(예를 들어 달러 자산)으로 바꾸어 운용하는 트레이딩 전략을 가리켜 엔캐리 트레이드라고 부른다. 이 전략이 이익을 내기 위해서는 엔의 금리(자본 비용)가 다른 통화의 금리(수익률) 보다 낮아야 하며, 양 통화의 금리 차(이자율 패리티) 이상으로 엔이 절상되어서는 안 된다는 두 가지 조건이 성립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당연하다. 조달 금리가 낮은 엔으로 돈을 빌려 수익률이 높은 달려 자산으로 운용하면 외견상 금리 차만큼 이익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지만, 달러 자산으로 운용한 돈을 엔으로 다시 바꿀 때 엔의 가치가 금리 차 이상으로 절상되어 있다면 금리 차 이익이 환차손에 의해 모두 상쇄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앞서 공부한 아트비라지 원리에 따르면, 정상적인 금융 환경에서는 일본과 미국 간의 거대한 자본이동에 의해 엔캐리 트레이드로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급히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엔케리 트레이드의 조건이 장기간 유지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의 금융 시장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정부의 재정 적자가 매우 커서 엔의 금리가 높아져야 하는 데도 워낙 개인 저축이 많은 일본 사람들이 자국 국채를 선호하기 때문에 금리가 계속 낮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또 일본은 여전히 수출을 중요시하는 나라로서 중앙은행이 막대한 외환 보유고를 쌓아 가며 엔의 빠른 절상을 저지하고 있으므로 엔의 환율이 충분히 절상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장 외적인 이유로 엔캐리 트레이드의 조건이 지속되어 온 까닭에 월스트리트 투자은행뿐 아니라  개인들도 아비트라지로 돈을 벌었습니다. 특히 '와타나베 부인'이란 별명이 붙은 일본의 주부 재테크 사단이 아비트라지 행렬에 참여해 언론의 관심을 끌기도 했습니다.

 

 

일국양제하의 홍콩


홍콩이 세계사에 등장한 것은 아편 전쟁으로 영국군이 홍콩 섬을 점령한 1841년이며 그다음 해 홍콩은 영국에 할양되었습니다.
이것이 홍콩이 동아시아의 무역 및 금융 센터로 발전하게 된 기점이었습니다. 1841년 자딘매스선(Jardine Matheson)이 광저우에서 홍콩으로 거점을 옮기면서 영국 자본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1865년에 홍콩상하이은행(HSBC)이 설립되고 1891년에 증권거래소가 개설되면서 홍콩의 발전이 탄력을 받았습니다.
전후 홍콩은 영국 점령하의 자유 무역항으로서 각국의 무역 회사들이 모여들었으므로 홍콩의 금융은 무역 금융 센터로서의 특성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런던에서  유로달러 시장이라는 역외 금융이 큰 성공을 이루자, 홍콩은 이를 복제해 역외 달러 시장을 키운다는 구상에 의해 서구 금융 기관을 다수 끌어모으고, 달러 표시의 채권 발행, 신디케이티드 론의 조성 등 자본 시장업무를 확대했습니다.

이로써 홍콩은 명실공히 동아사아의 금융 허브로 기능해 왔습니다.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될 때는 홍콩의 금융 시장이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가 컸습니다. 그러나 일국양재라는 중국 공산당의 유연한 접근 방식에 의해 오히려 홍콩의 역할은 증대되었습니다. 중국은 외자 도입의 파이프라인으로서 또 자국 기업 및 금융 기관의 대외 창구로서 홍콩의 시장경제를 보전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홍콩에는 서구 자본의 동아시아 진출 교두보라는 종래의 특성에 더해 중국 기업의 대외 진출 창구라는 새로운 특성이 가미되었습니다.

홍콩은 현재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중국 기업의 자금 조달시장으로서 막중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홍콩의 미래가 마냥 순탄한 것은 아닙니다. 홍콩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싱가포르가 국제 금융 분야에서 자유화를 급속히 추진하면서 맹추격하고 있습니다.

싱가포르 정부의 공격적인 유인책에 의해 헤지 펀드 등이 홍콩에서 싱가로르로 운용 거점을 옮기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또 사정에 따라서는 중국이 본토로 금융을 집중하는 전략을 추구할 경우 홍콩의 지위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중국판 금융 빅뱅은 당장 목전에 닥친 일은 아니지만 19세기 이후 국제 금융 센터로서 발전해 온 홍콩의 위상을 불투명하게 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자유주의로 매진하는 싱가포르

 

홍콩과 마찬가지로 싱가포르의  금융도 영국 식민주의의 유산입니다. 영국이 싱가포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홍콩을 접수하기 이전입니다. 동인도 회사 직원이었던 토머스 래플스(Thomas Raffles)는 중국과의 무역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1819년 싱가포르를 서둘러 개항시켰습니다.

이후 싱가포르는 영국으로부터 자유무역주의를 세례 받고 아시아 전역에 흩어져 있던 화교 네트워크를 활용해 무역 허브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 리콴유의 비전과 전략이 더해졌습니다. 리콴유는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에서 독립한 1965년부터 1990년까지 사반세기에 걸쳐 총리직을 수행하면서 싱가포르를 아시아에서 가장 살사는 나라로 키워 냈습니다.

리콴유의 정치는 권위주의가 강해 개발 독재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사실 그는 영국식 교육을 받아 자유주의적인 국가 건설에 대한 의욕이 강했으며, 이것이 상업적 마인드가 강한 화교의 경제 활동을 자극함으로써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싱가포르는 리콴유 시절부터 규제를 대폭 완화해 외자 진출을 적극적으로 유도해 왔습니다. 1968년 비거주자 예금에 대해 이자소득 과세를 철폐했으며, 1970년에는 스위스의 프라이빗 뱅킹을 본떠 비밀 계좌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자유화 전통이 이어져 오늘날 싱가포르의 금융은 도쿄 시장을 위협할 정도로 외환 거래 규모가 크며, 주식시장과 파생상품 시장을 통합한 싱가포르거래소(Singapore Exchange, SGX)는 국제적으로 위상이 매우 높습니다.

또 세제 혜택이 나 신규 펀드 설정에 대한 과감한 규제 완화 정책으로 헤지 펀드를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있습니다.

싱가포르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홍콩처럼 중국이 직접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게다가 국부 펀드의 대명사인 테마섹, 싱가포르투자공사(GIC)의 국제적인 투자 활동은 매우 전략적이고, 국가가 금융을 성장 엔진으로 지목해 풍력 지원한다는 인상이 뚜렷합니다.

 

리콴유는 한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이 용트림을 시작한 이상 그 어떤 산업 정책으로도 중국과 대적할 수 없다. 싱가포르 정도의 작은 인구라면 국민연금을 전략적으로 운영해 국민을 먹여 살릴 방안을 찾아야 한다. 21세기의 특성은 수익성이 높은 투자 기회가 전 세계에 산재한다는 것이다. 이 기회를 살려야 한다."

그러나 싱가포르 경제는 중국과 인도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으며, 이슬람 국가들로 둘러싸여 있다는 지정학적 특성이 싱가포르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합니다.

특히 아시아의  스위스를 겨냥해 이루어진 해외 자본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한 정책이 국제 정치 문제로 비화할 소지가 있습니다. 실제로 북한이나 미얀마가 불법 자금을 싱가포르에 예치했다는 이유로 미국과 불편한 관계가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한국 금융의 미래

 

한국 경제는 1997년 통화 금융위기를 분기점으로 국가 주도, 관 주도의 경제에서 시장 주도, 민간 주도의 경제로 대전환했습니다. 이른바 박정희 모델이라고 일컬어지는 개발 연대의 국가 중시 패러다임이 시장경제 패러다임으로 치환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의 금융은 관치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면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IMF가 집도한 한국읭 금융 빅뱅은 외환 시장과 자본시장을 개방해 국내외 자본에 자유로운 유출입을 보장했으며, 기존의 은행 중심 금융 시스템을 자본 시장 중심으로 개편하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또 주주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기업 지배 구조를 개혁하고 기업의 투명성을 높인 결과 한국 기업에 대한 전 세계 투자자들의 관심 높아졌습니다.

이러한 금융 개혁은 매우 급진적인 방식으로 추진되었으며 그로 인한 부작용도 상당히 컸습니다. 특히 자본 자유화에 따라 외국자본이 국내 유력 대기업 및 금융 기관에 대한 소유 지분을 빠르게 확대하고 주주 증시의 경영을 압력함으로써 기업들이 수익률이 낮은 국내 투자를 기피하게 되었으며 금융 기관들은 기업 대출 비중을 줄이고 가계 대출 비중을 늘려 나갔습니다. 

이러한 전환은 기업과 금융 기관의 수익성과 건전성을 높이는 데는 기여했지만, 국민 경제 전체적으로는 GDP 대비 총투자의 비중을 크게 낮춰 일자리 창출이 크게 제약되고 청년 실업이 심화하는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위기 상황에서 국내 대기업과 금융 기관을 헐값으로 인수한 외국 자본에 대한 시민 사회의 분노도 분출되었습니다. 특히 공적 자금이 투입된 은행들이 별다른 민영화의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뉴브리지캐피털, 칼라일, 론스타 등외국계 사모 펀드(PEF)에 속속 인수되었는데, 이들은 은행의 경영 개선에는 크게 기여한 바가 없으면서도 수조 원에 달하는 자본 이득을 취하고 빠져나감으로써 국부 유출이라는 논란이 가열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시장 증시의 금융 개혁은 꾸준히 진행되었으며, 이에 따라 금융 기관의 대형화, 겸업화가 크게 진척되었습니다. 특히 은행 간의 대형 합병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이제 상위권의 국내은행들은 자산 규모에서 세계 100위권에 근접하게 되었습니다. 또 은행을 중심으로 금융 지주 회사를 설립하는 것이 대세를 이루어 이제는 지주 회사 산하에 은행, 증권, 보험, 자산 운용 등의 자회사를 포진시킨 대형 금융 그룹이 탄생했습니다. 향후 세계 경제가 일체화하는 추새가 더욱 진전되고 중국 경제의 비상도 계속될 것이므로, 국제적인 환경 변화에 대응해 금융 대자본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이 탄력을 받은 결과 이러한 대형화, 겸업화의 흐름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금융 기관의 자산 운용입니다. 대형화, 겸업화로 인해 금융 기관의 자산 규모는 커졌는데 국내 기업들의 자금 수요가 줄고 있어 금융 기관의 자산 운영에 적신호가 커진 것입니다. 이는 자칫 미국처럼 금융 기관의 자산운영이 지나치게 가계 금융에 집중되어 서브프라임 위기와 같은 초대형 금융 불상사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이에 국내 금융 기관들은 향후 자산 운영을 다변화한다는 차원에서 자본의 해외 수출에 큰 비중을 두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이것이 바로 한국 금융의 국제화를 요구하는 여건의 변화입니다. 때문에 국내 금융계에서는 서울의 도심과 신공항을 잇는 서해안 발전 축을 동북아시아의 금융 허브로로 키우자는 비전이 대두되었으며, 정부는 이러한 요구에 부응해 금융허브추진법, 자본시장통합법을 제정함으로써 금융시장의 국제화, 금융 업종 간 장벽 허물기를 위한 제도 정비를 서둘러 왔습니다. 문제는 한국의 금융이 국제화를 추진할 만한 금융력을 확보했는가입니다. 특히 전문적인 문제 해결 능력과 어학력을 겸비한 국제 수준의 금융 인재를 어떻게 공급할 것인지, 그리고 중국 등 동북아시아 지역에 대한 시장 정보를 어떻게 국내로 집중시키고 이를 부가가치가 높은 정보로 가공해 전 세계로 발신할 수 있는지는 한국의 금융이 해결해야 할 어려운 과제입니다.
또 국제적인 금융 거래를 활성화하려면 추가적인 규제 완화, 세제 개편등 금융 자본에 우호적인 제도의 설계가 필요한데, 과연 이러한 제도 개혁이 국민적 합의 속에서 이뤄질 수 있는가도 중요한 제약요인입니다. 
그러나 기존의 제조업 분야만으로는 양질의 일자리 확보가 어려운 사정에서 새로운 성장 산업을 키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므로, 금융의 국제화, 허브화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미래의 중요한 좌표임에 틀림없습니다.

728x90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