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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이야기-영국이 살아남은 이유는?

 

영국은 1,2차 대전을 거치면서 세계 패권국의 자리를 미국에 넘겨주고 파운드는 기축 통화로서의 지위를 상실했습니다. 그럼에도 런던은 국제 금융 센터로서 지위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유로달러(eurodollar) 시장의 창설에 있습니다. 즉 새로운 기축 통화인 달러의 시장을 미국밖에 창설할 수 있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런던이 살아남은 것입니다.

본래 달러 예금은 모두 미국 내 은행에 예치되어 있습니다. 예금자가 출금을 해서 다른 자에게 이체하더라도 예금주만 바뀌었을 뿐 예금 자체는 여전히 미국의 은행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예금자가 어떤 이유로 달러 예금을 미국 밖에 있는 은행으로 옮기면 미국밖에 달러 예금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때도 미국 밖의 은행이 미국 내의 은행에 여전히 달러를 예치하고 있으므로 실제 달러가 미국 밖으로 빠져나간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미국 밖에 달러 예금이 생긴 것입니다. 이처럼 미국 밖에 소재한 은행에 예치되어 있는 달러를 가리켜 유로달러라고 부릅니다.

 

이때 '유로'라는 접두사는 유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그저 '미국 밖' 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 은행에 예치된 달러 예금도 유로달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로달러 시장의 역사적 태동은 런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2차 대전 당시 소련은 미국과 함께 연합국의 일원이었으므로, 체제가 다른 나람임에도 미국 은행에 대외 결제용 달러 예금을 상당한 규모로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급격히 냉각하면서 소련은 미국에 예치된 달러 예금이 동결될까 우려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불상사에 대비하고자 소련은 런던에 은행을 설립하고 이 은행 앞으로 미국내 달러 예금의 명의를 이전했습니다.

소련이 런던에 설립한 은행은 국제법상 어디까지나 영국의 은행이므로, 미국이 이 은행 명의의 달러 예금을 동결할 수 없다고 계산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로달러 예금이 최초로 조성된 배경입니다.

 

그러나 유로달러 예금이 생겼다고 유로달러 시장이 곧바로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시장은 자금의 공급뿐 아니라 수요가 있어야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런던에서 비거주자들이 파운드 외의 외국 통화로 행하는 금융 거래에 대해 영국 은행이 1957년 아무런 규제를 하지 않겠다는 방치를 천명함으로써 역외(offshore) 금융 시장이 만들어지면서입니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면 유로 금융 시장은  파운드 외의 모든 외국 통화에 대해 열려 있는 시장이므로 '유로 통화(euro currency) 시장'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나, 워낙 달러의 비중이 크기 때문에 유로달러 시장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고 유로 달러 시장이 구체적인 장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로달러는 회계 장부상에 존재할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감독 당국이 이런 역외 시장을 허용하느냐입니다. 유로달러 시장은 일단 만들어지면 매우 자유로운 시장입니다. 미국 밖에서 형성된 시장이므로 미국의 금융 감독 당국이 이 시장을 규제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 이 시장을 조성한 영국의 입장에서도 자국 통화인 파운드가 사용되지 않는 비거주자 간의 금융 거래이므로 이 시장을 규제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로써 탈규제의 대규모 금융 시장이 창설되었으며,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금융기관들은 감독 당국의 규제를 회피할 목적으로 런던의 유로달러 시장에 경쟁적으로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유로달러 시장의 발전은 이후에도 지속되었습니다. 1960년대에는 달러 불안 문제로 미국이 달러 방위 정책을 구채화하자, 미국 기업의 해외 투자, 외국 금융기관의 미국 내 기채(채권의 발행) 미국 금융 기관의 자본 수출에 제동이 걸렸는데, 이로 인해 달러 조달에 비상이 걸린 다국적 기업들은 유로달러 시장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1970년대에 두 차례에 걸쳐 석유 위기가 발생하자, 석유 수출로 막대한 오일 머니를 획득한 산유국들은 유사시 미국이 달러 동결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우려해 주로 런던에 소재한 은행에 달러를 예치 했습니다. 이렇게 막대한 오일 머니가 런던에 유입되자, 런던 금융가 은행들은 중남미, 동유럽, 아시아의 개발도상국과 석유 수입국에 오일 달러를 유통시키는 신종 국제 금융업무로 막대한 이윤을 획득했습니다.

 

금융 허브 런던의 오늘과 내일

 

런던의 금융가 시티(City)는 작은 면적에 빗대어 '스퀘어 마일(Square Mile)' 이라고도 불립니다. 오늘날에도 시타에는 세계의 첨단을 달리는 금융 산업이 집적되어 있습니다.

유럽의 외환 거래가 집중되어 있고 유로달러라는 역외금융 시장이 발달했으며 신디케이티드 론(syndicated loan)이나 신용 파생상품(credit derivatives) 등 새로운 금융 상품이 끓임없이 개발되어 상품화에 성공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영국의 시티는 금융 시장의 규모나 비즈니스의 다양성, 유연성에 있어 월스트리트와 격차가 있기는 해도 나머지 유럽국가에 비해서는 독보적입니다. 특히 독일과 프랑스가 유로화 통합을 달성하면서 유럽의 금융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맹추격하고 있지만 시티는 여전히 우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티는 대영제국 시대 세계 금융의 중심지 엿? 던 전통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물론 시티에 대한 비판도 없지 않습니다. 특히 금융 자본의 이익을 편파적으로 중시하는 시티의 단기업적주의(short-termism)로 인해 영국의 제조업 기반이 무너져 내렸다는 비판의 소리가 높습니다. 

그러나 이는 다소 부당한 비판입니다. 시티가 해외로 자본을 수출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주로 외국 자본을 끌어다 해외로 수출하는 것이므로 시티로 인해 영국의 저축이 해외로 빠져나가 영국 기업의 국내 투자가 부진하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총리가 금융 개혁(빅뱅)을 추진한 1986년 이후 시티에는 윔블던(Wimbledon)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세계적인 테니스 토너먼트인 윔블던 대회에서 외국 선수들만이 두각을 나타낼 뿐 영국 선수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 것처럼, 영국의 금융 시장에서 영국적 금융 기관들이 자취를 감춘 것입니다. 그러나 빅뱅 이후 영국의 금융 산업은 외자 지배라는 문제점에도 많은 일자리를 창출했으며 일반인의 주식 시장 참여도도 높아졌습니다. 또 중·하류층의 상향 이동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시티에서는 워낙 성과 경쟁이 치열하고 노동 강도가 높아 유복하게 자라난 이들보다는 오히려 근로 계층이나 중산층 출신자들이 성공할 확률이 높습니다. 케임브리지, 옥스퍼드 등 명문대 졸업장을 받고, 시티의 명문 투자은행, 자산 운용사, 컨설팅 회사, 회계법인, 법무 법인에 취업해 탁월한 성과를 올리면 빠른 속도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습니다.

런던에서 시티 외에 신금융 시가지가 종성되었습니다. 과거 바나나 창고가 모여 있던 커네리워프(Canary Wharf)에 1990년대 이후 금융 기관들이 모여든 것입니다. 그 주된 이유는 IT와 접목된 오늘날의 금융이 새로운 형태의 건물 레이아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금융 기관의 트레이딩 장소(trading floor)는 최소 930평방미터 이상이어야 하며, 두터운 통신선을 깔 수 있도록 층간 여유 공간도 넓어야 합니다. 시티의 오래된 건물들은 이런 기술적인 요구에 부응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로써 런던의 국제 금융 센터는 시타와 커네리워프로 이원화되었으며 이 두 곳에 현재 약 30만 명이 취업해 있습니다. 영국의 도매 금융 시장에서 가장 비중이 큰 금융 기관이 미국계 투자은행 점, 여기에다 서브프라임 위기까지 겹치면서 영국의 금융 산업이 위축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습니다.

그러나 보다 긴 안목으로 바라보면 글로벌화 체제가 유지되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전망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국제적인 자본이동이 국제무역을 크게 상회하는 규모일 정도로 활발한데, 런던은 바로 이런 국제적인 자본이동을 중개하는 것이 지속적인 강점입니다.

따라서 런던이 오랫동안 전문성을 축적해 온 외환 거래, 국제적인 자산 운용, 국제적인 인수·합병, 역외 금융 및 역외 채권 발행 분야에서 계속 수월성을 발휘할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합니다.

 

 

◆ 대처의 금융 빅뱅 ◆

강성 노조의 일전을 통해 정치력을 과시한 대처는 영국 금융권에 개혁의 메스를 가했습니다. 대처는 영국이 미국에 비해 자본 시장의 발전이 크게 지체되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영국계 증권사들의 기득권 구도를 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로써 1986년 증권 브로커 거래의 고정 수수료가 폐지되고 외국 증권사도 거래소의 회원사가 될 수 있도록 자유화하는 개혁 조치가 단행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국의 금융 빅뱅입니다. 그 결과는 대처가 원래 예상했던 것을 크게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모건그랜펠(Morgan Grenfell), 클라인워트 벤슨(Kleinwort Benson), 슈로더(Schroders) 등 유력 영국계 증권사들이 속속 외국계 증권사에 매각되었고, 영국 자본 시장에 영국계 주자가 존재하지 않는 윔블던 현상이 초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치열한 경쟁에 의한 국적 증권사가 외국계에 흡수·합병되면서 오히려 런던 증시의 활력이 높아졌습니다. 그 덕분에 유럽의 금융 중심지를 런던에서 대륙으로 이동시키려는 유로화가 탄생했음에도 런던의 지위가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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