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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위기-신뢰게임이라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삼위일체 불가능성 원리에 따르면 한 나라가 고정 환율제를 페기하고 변동 환율제를 폐기하고 변동 환율제를 채택하면 원리상 통화 위기는 발발할 수 없습니다. 변동 환율제 하에서는 환율이 경제의 균형을 회복시키는 방향으로 자유롭게 변동하면서 안정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금융 선진국에서는 고정 환율제를 포기하고 변동 환율제를 채택하는 것만으로 쉽게 통화 불안 문제가 수습됩니다. 예를 들어 1992년 소로스의 퀀텀 펀드가 유럽의 고정환율메커니즘(ERM)에 가입해 있던 영국의 파운드화를 공격했을 때, 영국은 마침내 ERM을 포기하고 변동 환율제로 이행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조치를 단행한 후 파운드의 가치는 15% 정도 하락한 수준에서 다시 안정되기 시작했고, 파운드의 절하 덕분에 영국의 수출 경쟁력이 회복되었습니다. 동시에 파운드의 고정 평가를 유지해야 하는 부담을 벗게 된 영국 은행은 금리 수준을 낮추는 재량적 통화 신용 정책으로 경기를 부양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처럼 소로스의 투기 공격을 받아 발발한 1992년 파운드의 위기는 유럽의 통화 동맹을 추구하던 범유럽 주의자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이고 안타까운 사건이었지만 영국 경제의 입장에서는 결코 잃은 것이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1997년 동아시아 외환 위기 직후 호주 달러도 투기적 공격을 받았습니다. 1996년 호주 달러의 가치는 미국 달러로 약 80센트였으나 동아시아 위기가 발달한 후 호주 달러의 가치는 미 달러 60센트로 주저 앉았습니다. 호주의 주된 수출 상대국이 동아시아 국가였으므로 호주 달러의 가치가 빠진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헤지 펀드 등 투기 세력은 호주 달러의 가치가 더 많이 빠져야 한다고 생각해서 호주 달러를 공매도해 쇼트 포지션을 키웠으므로 호주 통화 당국은 매우 긴장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태가 통화 위기로 확대되지는 않았습니다. 호주중앙은행이 자국 통화가치를 지지하기 위해 외환 시장에서 호주 달러를 사들인다거나 이자율을 올리는 식의 개입을 하지 않았음에도 호주 달러의 하락세는 저절로 멈추고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투자자들은 호주 경제가 건전하고 안정적이라고 믿고 재차 호주 달러를 사들였습니다. 이처럼 동아시아 통화 위기에도 호주 경제는 순항했습니다.

영국과 호주의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금융 선진국에서는 변동 환율제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입니다. 때때로 환율의 불안한 변동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환율 변동이 통화 위기, 경제 위기로 비화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환율이 급변동하는 사태가 있지만 일정 기간이 경과된 후 저절로 안정을 되찾고 오히려 경제의 순항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멕시코, 태국 등 신흥 개발도상국의 경우에는 변동 환율제로 이행한 후에도 통화 가치의 폭락세가 멈추지 않아 '통화 위기 → 금융 위기 → 경제 위기' 라는 악순환에 빠져들었습니다.

이것은 삼위일체를 불가능성 원리에 허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의 목표를 포기했음에도 경제의 안정을 얻지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브프라임 위기 때 우리나라에도 유사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변동 환율제가 정착되어 있었음에도 서브프라임 위기의 여파로 외자가 빠르게 이탈하면서 통화 위기의 위험성이 재차 부각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외환 보유고가 충분했고 국내 금융 기관이 미국 주택 대출 유동화 증권에 투자한 규모도 크지 않았습니다. 단지 경상 무역 수지가 소폭의 적자 상태였고 금융 기관의 단기 외채 비중이 다소 높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작은 이유만으로 국제 자본이 이탈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면 한국보다 단기 외채 비중이 월등히 높고 서브프라임 관련 투자 손실도 훨씬 큰 영국에서는 상대적으로 국제 자본의 이탈 현상이 두드러지지 않아 크게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크루그먼은 이 같은 현상을 가리켜 "신뢰의 게임(game of confidence)"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똑같이 변동 환율제를 채택하고 있는데도 어떤 나라에서는 유사시 국제 자본의 이탈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은 반면 어떤 나라는 매우 급속하고 과대하게 외자가 이탈하면서 통화 가치가 무제한 폭락하는 사태가 빚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한국과 같이 금융 시장 개방의 경험이 일천한 나라의 입장에서 매우 심각한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금융 당국이 경제 사정을 고려해 자본 자유화를 선택하고 고정 환율제를 포기했는데, 나머지 하나의 목표인 금융 정책의 자율성까지도 포기해야 하는 모순적 상황이 전개된 것입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대외 신인도가 높지 않은 나라일 경우 자본 자유화가 이뤄진 환경에서는 고정 환율은 물론이거니와 금융 정책의 자율성까지도 모두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삼위일체 불가능성 원리와 달리 하나의 목표를 선택한 후 두 가지 목표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됨에 따라 자본 자유화 폐해론 혹은 자본 이동 규제론이 대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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