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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이야기-세 개의 수도꼭지를 열다.

 

서브프라임 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천문학적 규모의 공적 자금이 투입되었습니다. 문제를 초래한 금융 기관들을 응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제함으로써 대마불사의 문제가 현실화한 것입니다.

원칙적으로, 부실을 초래한 금융기관을 공적 자금을 투입해 살리는 것은 시장경제 원칙에 어긋납니다.

그럼에도 구제 조치는 불가피했습니다. 금융 기관의 부실을 방치하면 금융 중개 기능이 마비되고, 그 결과 금융의 위기가 실물의 불황으로 확대되어 모두가 고통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금융 시장 규모는 50조 달러를 웃돕니다. 이 시장이 다시 가동하지 않으면 1930년대의 대공항이 재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연준이 아무리 본원 통화를 공급해도 금융 중개 기능이 잘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케인스가 지적한 유동성 함정의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흔히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중앙은행이 본원 통화를 늘리면 민간의 신용 창조 메커니즘이 작동해 자동적으로 통화량이 늘어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금융 시장의 유동성은 세 개의 수도꼭지가 동시에 열려야 비로소 제대로 창출됩니다.

 

첫째 수도꼭지는 중앙은행의 본원 통화 공급입니다. 둘째 수도꼭지는 민간 은행의 대출입니다. 한 은행의 대출은 다른 은행의 예금으로 흘러들어 가고, 이것이 다시 대출로 흘러나오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예금 통화가 창출되고, 그럼으로써 시중에 통화량이 늘어납니다. 셋째 수도꼭지는 자산 가격의 상승으로 신용이 확대되는 과정입니다. 시중에 유동성이 풍부해지면 주식이나 부동산 등의 자산 가격이 오르게 되고 이들 자산을 담보로 재차 신용이 창조됩니다.

즉 증권화의 수레바퀴가 돌아가면서 신용 확대가 이뤄지는 것입니다.

2009년 초 미국이 처한 사정은 연준이 헬리콥터를 타고 아무리 본원 통화를 살포해도 신용 창조와 증권화의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 유동성 함정의 상황이었습니다. 즉 첫 수도꼭지만 활짝 열려 있을 뿐 두세 번째 수도꼭지가 잠겨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유동화 증권의 가격이 폭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레버리지를 동원해 엄청난 규모로 유동화 증권에 투자한 상업은행이나 투자은행, 보험사 헤지 펀드 들로서는 누적된 부실로 인해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거래 상대방 위험(counterparty risk)에 사로잡혀 거래를 기피하면서 금융 시장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금융 기관의 부실부터 걷어 내야 합니다. 그래야만 금융 기관들 간에 자금 순환이 이뤄지고 증권화 시장의 메커니즘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되어야만 비로소 주택 대출 시장, 자동차 할부 대출 시장, 신용카드 시장 등 증권화에 의존하는 대출 시장이 재가동되어 실물 경제의 붕괴를 막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공적자금을 투입해 금융 기관에 대한 구제 조치가 이뤄진 것입니다.

 

규제 개혁 요구가 분출하다.

 

서브프라임 위기가 다소 진정되자 금융 규제론이 부각되었습니다. 금융의 탐욕과 오작동으로 인한 위기가 재발하지 않도록 규제의 틀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규제 개혁 의제는 대략 열 개정도로 압축되었습니다. 첫째, 대출 상품 규제론입니다. 금융 기관들이 불량 대출 상품을 남발했으므로 대출 상품에도 적합성 기준(suitability standard)을 만들어 그 준수 여부를 감독 기관이 감시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합니다. 그러나 상품 규제는 원천적으로 시장경제의 기본 전제인 계약의 자유를 훼손할 뿐 아니라 ㄹ시장의 혁신을 제약할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둘째, 증권화 폐해론입니다. 증권 활로 인해 호황기에는 주택 금융시장에 자금이 과다 공급되어 집값을 한껏 끌어올리는 반면, 불황기에는 자금 공급을 마비시켜 집값을 폭락시키면서 금융시장 전체를 위태롭게 한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즉 증권화 메커니즘에 거품을 키우고 터뜨리는 기제가 장치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증권화의 문제점은 심각합니다.

 

그러나 증권화에는 단점을 상쇄할 만한 큰 장점도 있기 때문에 증권화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한 예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집을 갖고 살게 된 데는 대출 채권을 증권화함으로써 대출에 따른 신용 위험를 자본 시장에 참여하는 투자자에게 분산시켜 금융 기관의 대출 능력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섯째, 부외 자회사(off-balance sheet subsidiary) 불허론입니다. 시티 등 대형 상업은행들은 부외 자회사 형태로 투자 전문 자회사(structured investment vehicle, SIV)를 설립했는데, 이들은 자기 자본 규제를 받지 않으면서 서브프라임 관련 유동화 증권에 투자해 높은 이익을 올리기 위함 편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초 기대한 대로 위험이 차단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티 등 스폰서 은행은 비상 대출 라인을 설정해 줌으로써 투자 전문 자회사와 재원 조달을 지원했는데 서브프라임 위기가 심화되어 투자 전문 자회사가 자금난에 처하자 실제로 비상 대출 라인을 가동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부외 자회사의 리스크가 스폰서 은행에 즉각 이전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부외 자회사 문제는 엔론의 분식 회계 사전 때 이미 부각된 바 있으며, 서브프라임 위기 때 재차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부외 자회사란 본질적으로 특수 목적회사(special purpose company, SPC)로, 매우 다양한 용도로 설립되는 만큼 이를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넷째, 시가 회계 재검토론입니다. 시가주의 회계의 핵심은 대차대조 표상의 자산 가치를 가장 최근의 시장 가격으로 평가해 재무 투명성을 높이자는 것입니다. 즉 자의적으로 경영실적을 부풀리거나 줄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가 회계는 일단 금융 시장이 위기 국면에 들어가면 오히려 위기를 더 심화시킨다는 문제가 드러났습니다.

금융기관이나 각종 펀드가 평가손을 발표하면 평가손이 난 자산에 마진 콜이 들어오고, 그에 대응하기 위해 이들 자산을 투매해 대차대조표가 더욱 악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시가 회계를 폐기하고 장부 가치 회계(book value accounting)로 돌아가는 것이 대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장부 가치 회계로는 자산의 현재 가치를 알 수 없는 만큼 정보의 신뢰도가 크게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투자자의 알 권리를 제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레버리지 규제론입니다. 그간 월스트리트의 유력 투자은행들은 자기 자본의 30~50배에 달할 정도로 레버리지를 동원해 투기를 벌이고 그에 따른 위험을 사회에 떠넘겼습니다. 즉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했습니다.

따라서 투자은행이 레버리지를 낮추도록 하는 조치가 불가피한데, 문제는 투자은행에 자금을 빌려주는 금융 기관의 자산 운영까지 일일이 규제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입니다.

여섯째, 금융 겸업 재고론입니다. 1999년 그램·리치·블라일리 법이라는 금융 서비스 현대화 법이 통과되어 하나의 금융 지주 회사 밑에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겸업하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이를 다시 대공황기의 글라스·스티걸 법으로 되돌려 금융 겸업을 불허하자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금융 겸업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서브프라임 위기가 발생했다는 논리적 연결 고리가 불분명하다는 점입니다. 

 

일곱째, 신용 평가 제도 개혁론입니다. 신용 평가사들은 채권 발행자로부터 평가 수수료를 받기 때문에 전형적인 이해 상충 문제가 유발되며, 이로 인해 신용 등급 판정의 객관성에 의혹이 제기됩니다.

원론적으로는 신용 등급을 이용하는 것은 투자자이므로 투자자로부터 수수료를 징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한데, 그럴 경우 일부 투자자만 수수료를 내고 다수는 무임승차하려 한다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여덟째, 파생 금융 상품 규제론입니다. 파생상품 중 특히 신용 부도 스와프(CDS)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특히 CDS는 조직화된 거래소 시장이 아닌 장외 시장에서 거래되기 때문에 거래 상대방 위험이 심각하게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CDS를 대거 발생한 투자은행, 보험사들이 서브프라임 위기 때 심각한 상황에 물렸습니다. 

따라서 장외 파생상품 시장을 규제해야 한다는 논리가 힘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파생 금융 상품 시장은 본질적으로 금융 상품에 내재되어 있는 위험을 사고파는 시장으로서 현물 금융 시장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는 주장도 타당하므로 과도한 규제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아흡째, 헤지 펀드 규제론입니다. 헤지 펀드가 높은 레버리지를 구사하는 방식으로 금융 시장의 시스템 위기를 가중시킨 사례가 많으며, 서브프라임 위기 때는 헤지 펀드의 위기가 스폰서 금융기관의 경영 파탄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헤지 펀드 규제론이 강력하게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헤지 펀드를 무조건 규제하는 것이 능사일 수 없습니다. 헤지 펀드처럼 시장의 대세와 반대로 갈 수 있는 이단자(contrarian)가 있어야만 금융 시장에 다양성이 확보되고 금융 시장의 유동성이 더 높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열째, 보상 체계 개혁론입니다. 금융 기관 경영자와 핵심 간부들이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한다는 비판이 가능합니다. 이런 모순이 발생하는 데는 단기 업적으로 중시하는 보상 체계도 한 몫합니다.

개인은 단기로 실적을 내서 높은 보수를 받은 후 더 높은 연봉을 약속하는 다른 금융기관으로 옮겨 가고, 이들이 초래한 높은 위험이 손실로 나타나면 금융 기관이 위태롭게 됩니다.

따라서 금융인의 보수 체계를 가능한 한 장기 업적과 연계하도록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은 타당합니다. 그러나 보수 계약은 어디까지나 조직과 개인 간의 사적 영역인 만큼 이를 규제하는 것은 계약 자유의 원칙을 침해한다는 비판이 가능합니다. 이처럼 개인적(사적) 영역과 사회적(공적) 영역이 충돌할 때 어떤 법적인 원칙과 철학에 의해 양자를 조정해야 할 것인지는 어려운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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