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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지 투기의 혼합 상품 키코의 치명적인 위험성

 

우리나라에도 옵션을 이용한 복합 금융 상품이 등장했습니다. 2008년 9월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위기가 본격화한 후 우리나라에서는 키코(KIKO, knock-in, knock-out) 소동이 일어났는데, 이 키코가 바로 옵션을 이용한 복합 금융 상품입니다. 도대체 어떤 상품이기에 문제가 될 것인지 상품의 구조를 들여다보기로 합니다. 키코는 환율의 범위를 지정해 그 안에서 지정된 환율로 외화를 거래하는 상품, 만들어 판 곳은 은행이고 산 곳은 주로 중소 수출 기업입니다. 

키코를 산 수출 기업은 향후 원화 환율이 약정된 구간 내에서 움직이면 미리 약정한 환율에 약정한 금액의 달러를 팔 수 있으므로 환위험을 헤지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하지만 향후 환율이 약정한 구간을 벗어나면 크게 손실을 보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키코는 환위험 헤지와 투기를 혼합시킨 상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환율이 일정한 구간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녹아웃(knock-out)이라고 하는데 이 상태가 되면 계약이 소멸되어 수출 기업에 불리하며, 반대로 환율이 급등해 구간 위로 올라가면 녹인(knock-in) 상태가 되어 약정 금액이 원 계약 금액의 수배(레버리지 배수만큼)로 늘어나게 되므로 역시 수출 기업에 불리합니다.

 

예컨대 환율 약정 범위가 달러당 900~1,000원의 구간이고 약정 환율이 1,000원입니다. 계약 금액은 100만 달러이지만, 녹인 상태에서는 레버리지가 두 배로 약정되어 있다면 약정 금액이 원계약 금액의 2배인 200만 달러로 증대됩니다. 이러한 키코 계약을 맺은 수출업체는 환율이 910원이 되어 구간 내로 들어오면 약정 환율 1,000원에 100만 달러를 매각해 총 9,000만 원(90원 x100 만 달러)의 환차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화가 크게 절상되어 환율이 900원 밑으로 내려가면 키코 계약은 녹아웃이 되어 계약이 소멸되므로 수출업체는 환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됩니다. 

한편 원화가 크게 절하해 환율이 약정 범위인 1,000원의 상한을 약정 범위인 1,000원의 상한을 벗어나 1,050원이 되면 키코는 녹인 상태가 되며 계약 금액은 레버리지 약정에 의해 200만 달러로 늘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수출업체는 계약 금액 중 100만달러는 수출 대금으로 수취한 달러로 지급할 수 있지만, 나머지 100만 달러는 시장에서 1,050원의 환율로 매입해 지급해야 하므로 총 5,000만 원(50x100만 달러)의 환차손이 발생합니다. 

 

이처럼 키코상품은 환율이 약정 구간을 벗어날 경우 모두 환차손이 발생하는 구조입니다. 특히 환율이 상한을 벗어나 녹인 상태가 되었을 때 레버리지가 3~4배로 크게 벌어지도록 약정되어 있다면 환차손은 천문학적으로 커져 계약을 맺은 기업의 경영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키코는 어떤 원리로 설계된 된 것일까? 약정 범위 내에서 약정환율로 거래한다는 측면에서는 선도환 계약의 특성이 일부 있지만 본질적으로 키코는 옵션 상품입니다. 

계약 구간 내에서 계약 환율로 달러를 팔 수 있다는 것은 은행이 기업에 달러 풋옵션을 판매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환율이 계약 상한을 벗어나 녹인 상태가 되었을 때 계약 환율로 거래해야 하는 것은 기업이 은행에게 달러 콜옵션을 판매한 것이며, 또 환율이 계약 하한을 벗어났을 때 계약이 실효되는 것은 기업이 은행에게 판매한 콜옵션을 은행이 행사하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키코의 공정성을 따지려면 풋옵션의 가치와 콜옵션의 가치가 서로 비슷한가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이 상품은 한국시티은행이 처음 출시한 후 국내 은행들이 수출 중소기업을 상대로 판매했습니다.

 

판매가 왕성하던 2007년 말부터 2008년 초 시점에는 원화 환율이 비교적 안정적이었으므로 중소기업들도 이 상품에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즉 중소기업들은 환율이 약정 범위인 900~1,000원에 머물 것으로 내다보았고, 이 범위 내에서는 달러당 1,000원이라는 매력적인 약정 환율로 헤지가 가능하므로 이익이 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환율이 900원 밑으로 내려가면 계약이 녹아웃되어 헤지 효과가 소멸되고 환율이 1,000원보다 높아지면 계약 금액이 레버리지 약정에 의해 두세 배로 늘어나 막대한 환차손이 발생하게 되어 있는 치명적인 위험이 내재된 상품이었습니다.

마침내 극단적인 상황이 도래했습니다. 2008년 9월 서브프라임 위기의 와중에서 해외 기관 투자자들이 본국에서 입은 막대한 자본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국내 자본 시장을 서둘러 이탈하면서 원화 매도, 달러 매입 거래가 폭증해 원화 환율이 치솟았습니다. 이로 인해 키코 계약은 모두 녹인 상태로 돌변했고 중소기업들은 달러를 비싸게 사들여 은행에 지급하면서 막대한 환차손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에 중소기업들은 은행측의 잘못된 권유로 인해 고위험 상품에 가입했다는 점을 내세워 키코 약관의 문제점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공정거래위원회는 중소기업들이 키코의 매력에 도취되어 수출액 이상으로 계약을 맺고 환투기를 벌인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2009년 7월 25일 "키코 계약이 원천적으로 불공정하다고 볼 수 없다."라는 최종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중소기업들은 이에 반발해 소송을 제기했으며 키코 재판은 국제적인 논쟁으로 비화했습니다. 중소기업 측에서는 2003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 뉴욕 대학 스턴 경영대학원의 로버트 엥글(Robert F. Engle) 교수를 법정에 내세웠습니다. 그는 "키코 계약을 구성하고 있는 풋옵션과 콜 옵션의 가치를 평가한 결과 기업이 입을 수 있는 최대 손실액이 은행의 100배 이상"이라고 지적하면서 "키코는 상품 설계 단계부터 은행에만 유리한 불공정한 상품으로 절대로 중소기업에 판매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은행 측에서도 미국 MIT 슬론 경영대학원의 스티븐 로스(Stephen Ross) 교수를 증인으로 채택했습니다. 로스는 "기업이 보유한 외화 자산이나 수출 금액 이상으로 키코 계약을 맺었다면 이는 헤지라기보다는 도박으로 봐야 한."라고 주장해 앵글과 대립 각을 세웠습니다.

 

사실 두 교수의 주장은 모두 타당합니다. 엥글의 주장은 옵션의 가격 평가라는 관점에서 타당하며, 로스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당사자가 원해서 맺어진 계약이란 점에서 타당합니다.

그러면 감독 당국은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 어디까지나 민간 계약이므로 당국이 관여할 여지가 없었던 것일까? 금융 상품에 내재되어 있는 위험성에 대해 면밀한 검사를 실시하고 금융 기관에 시정 조치를 요구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이 역시 맞는 말이다. 그러나 감독 당국이 민간의 혁신을 따라가면서 실효성 있는 금융감독을 해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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