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728x90
반응형
BIG

옵션 가격은 어떻게 도출하는가?

 

역사적으로 옵션이 현대적인 모습으로 등장한 것은 17세기 네덜란드입니다. 1630년대 네덜란드에서는 외견상 양파와 별반 차이가 없는 튤립의 알뿌리가 당시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의 최대 걸작인 《야경(De Nachtwacht)》(1642)의 서너 배 값에 팔릴 정도로 튤립 마니아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세계 금융의 중심지였던 암스테르담에서는 튤립 투기를 더욱 부추기는 금융의 혁신이 있었습니다. 바로 튤립 콜옵션이었습니다.

튤립 도매상들은 돈 많은 귀족들을 상대로 튤립 선물을 매도했는데, 이로 인해 선물 계약을 이행하는 데 필요한 튤립을 미래의 현물 가격을 지불하고 사들여야 하는 위험에 노출되었습니다.

이런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매상들은 튤립 재배 농가로부터 미리 정해진 가격에 튤립을 매입하는 권리를 창안했습니다. 이 권리는 주어진 기간 중에 미리 정해진 가격(행사 가격)으로 튤립을 살 수 있는 콜 옵션이었습니다. 이로써 도매업자는 튤립 가격이 오르면 옵션을 행사해 미리 정해진 가격으로 튤립을 확보하고 튤립 가격이 떨어지면 시장에서 튤립을 싸게 매입해 선물 계약에 따른 튤립 인도의무를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옵션 거래는 이미 오래전에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옵션의 가격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이론이 존재하지 않아 시장의 발전이 지체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1792년 뉴욕 증권거래소가 개설될 무렵에 이미 주식 옵션이 거래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옵션은 거래소에서 표준화한 상품이 아니라 장외 시장에서 거래 쌍방 간의 합의에 의한 계약이었습니다. 

따라서 건별로 조건이 달라 시장의 유동성이 매우 낮았습니다. 이를 화성 화하고자 협회가 결성되어 표준화, 조직화를 위한 노력을 벌였지만 옵션의 적정한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옵션 가격을 결정하기 위한 노력

 

20세기 초에 들어와 옵션 가격 평가라는 문제에 매달린 연구자가 있었습니다. 프랑스 수학자 루이 바슐리에(Louis Bachelier)입니다. 그는 1900년경 소르본 대학에 제출한 박사 학위 논문에서 주가의 움직임을 브라운 운동으로 포착하는 방식으로 옵션 가격을 다루었습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에 의해 브라운 운동의 수학적인 연구가 이뤄진 것이 이로부터 5년 후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연구는 매우 선구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슐리에가 제출한 논문은 당대의 유명한 수학자인 앙리 푸앵카레(Henri poincare)로부터 부적격 판정을 받았고 바슐리에는 교수직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는 마코위츠가 포트폴리오 선택 이론을 주제로 MIT에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했을 때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던 것과 마찬가지로 초기 금융경제학이  겪어야 했던 수난의 역사를 말해 주는 예입니다.

 

바슐리에 이후 정체돼 있던 옵션 가격 연구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낸 것은 1960년대 미국의 최대 경제학자였던 폴 새뮤얼슨(Paul Samuelson)입니다. 그는 신주 인수권부 사채의 가격 결정에 관심을 갖고 바슐리에의 연구를 추적할 정도로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뮤얼슨은 옵션 가격을 도출하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런던 중 1970년대 초 공동 연구 자였던 피셔 브랙(Fischer Black)과 숄스, 머튼 3인이 그때까지 수학적으로 답을 얻지 못했던 옵션 가격을 도출하는 데 마침내 성공했습니다. 블랙은 하버드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보스턴에 소재한 아서 디리틀(Arhur D. Little)이라는 컨설팅 회사에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숄스는 시카고 대학에서 금융경제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MIT 경영대학원에 임용되어 있었으며, 머튼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리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새뮤얼슨의 조수가 된 후 신주 인수권부 사체의 가격 결정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1970년 블랙과 숄스가 협력하고 있던 차에 머튼이 날카로운 조언을 해 경제학계의 오랜 숙제인 옵션 가격의 결정 원리가 규명되었습니다.

 

경제학의 새 시대를 연 블랙·숄스 모델

 

이들 3인은 고도의 고등 수학을 활용해 주가의 움직임을 브라운 운동으로 포착하고 확률 과정론을 적용해 옵션 가격이 만족해야 할 여러 조건을 하나의 미분 방정식으로 결합했습니다.

이를 변환하면 물리학에서 연구해 온 열전도 방정식과 동일한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블랙·숄스의 미분 방정식이며 이를 풀면 옵션 가격이 나온다.

최종적인 공식은 블랙·숄스의 모델 또는 블랙·숄스·머튼의 모델이라고 불리는데, 이 공식은 외견상 간단해 보이지만 이를 도출하는 수학적 프로세스는 대단히 난해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사람들은 경제학이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느꼈습니다. 이전까지 경제학이나 경영학에 사용되던 수학과는 차원이 다른 첨단 고등 수학이 적용될 여지가 있다고 직감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 미국에서는 원자물리학이나 우주과학 전문가 또는 로켓 과학자들이 금융 분야에 뛰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블랙·숄스 모델은 곧바로 시장에서 유용성이 입증되었습니다. 1973년에 시카고 옵션거래소(CBOE)가 개설되었으며, 그해 텍사스 인스트루먼츠(Texas Instruments)가 새 휴대용 계산기를 출시하며 낸 신문 광고에는 "블랙·숄스 모델 계산 가능"이라는 선전 문구가 삽입되기도 했습니다.

 

블랙은 자신의 모델에 대한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숄스와 함께 모델의 타당성을 검증하기 위해 실제 데이터를 사용해 옵션 가격의 이 론치를 계산해 보았는데, 대부분의 옵션은 현실치와 이론치가 같았지만 유독 하나의 옵션이 이론치 보다 실제적 가격이 훨씬 낮았습니다.

두 사람은 이 옵션이 이론적 가치에 비해 극히 저평가되었다고 판단하고 즉각 이 옵션을 매입했습니다. 그러나 이 회사가 배당정책을 변경하려 했기 때문에 옵션 가격이 시장에서 낮게 설정되었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습니다. 즉 블랙과 숄스가 모르는 이 정보를 시장 참가자들은 이미 알고 적절히 가격에 반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일화는 시장의 효율성을 입증하는 전형적인 예이자 블랙·숄스 모델의 위력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블랙·숄스 모델은 완성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연구가 처음부터 큰 박수갈채를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블랙과 숄스의 논문은 미국의 권위 있는 학술지 「경제학·통계학 저널(Journal of Economics and Statistics)」 과 「정치 경제 저널(Journal of Political Economy)」에 투고되었지만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채택 불가 사유는 내용이 틀렸다거나 창의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경제학 논문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바슐리에나 마코위츠의 논문이 겪었던 금융공학 수난의 역사가 반복되었습니다.

이후 이들의 논문은 시카고 대학의 밀러와 파마 교수의 중재에 의해 대폭 수정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1973년 [정치 경제 저널]에 채택되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이들은 파생상품의 가격 결정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1997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습니다. 수상자는 머튼과 숄스였습니다. 또 한 사람의 공동 연구자 블랙은 1995년에 타계해 수상자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728x90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