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728x90
반응형
BIG

현대 금융의 진화-주주가치를 높여라.

 

산업화된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풍요로운 일상을 영위한다. 그런 물적 조건을 제공한 것은 자본 중의 이며,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을 모집하고 활 요하고 증식해 온 법적인 주체는 주식회사이다.

주식회사에는 노동자, 경영자, 채권자, 주주, 국가 등 여러 이해 당사자들이 관여하고 있지만, 핵심적인 의사 결정의 권한은 주주에게 집중되어 있다.

주주야말로 주식회사가 추진하는 사업의 위험을 최종적으로 부담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현대 금융경제학에서는 기업의 목표와 성과를 주주 가치의 관점에서 포착하고자 한다. 특히 기업의 재원 조달 및 투자 활동을 다루는 기업 재무(corporate finance)에서는 주주가치를 객관화, 계량화할 목적으로 고도의 이론을 전개해 왔다. 

그런데 기업 재무 이론은 단지 상아탑의 고담준론에 머물지 않고 금융과 투자의 실무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다만 여기에서는 기업 재무의 본령에 도전한다기 보다는 그 윤곽을 살펴보는 데 중점을 두었다. 또 뒷부분에서는 오늘날 주주 가치를 높일 목적으로 기업들이 활발하게 활용하고 있는 기업 인수·합병의 경제학적 의미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살펴보겠다.

 

주식회사라는 새로운 실험

대항해 시대는 15세기 초부터  17세기 초까지 유럽의 배들이 지구를 돌며 항로를 개척하고 탐험과 무역을 하던 시기이다. 그 과정에서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대륙, 오세아니아 대륙과 같은 지리적 발견을 달성했다. 물론 이 시기 이전에 명나라의 정화(鄭和)가 인도양을 거쳐 아프리카의 서안에 도달했으므로 무조건 유럽적인 관점에서 대항해 시대를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그러나 새로운 항로의 개척을 식민지 개척으로, 또 사업 기회의 창출로 연결시킨 것은 유럽이다. 그리고 이러한 큰 규모의 모험사업이 꾸준히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주식회사 제도라는 금융의 혁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는 북동항로를 개척할 목적으로 1555년 영국에서 설립된 머스커비스(Muscovy)였다. 그러나 이익을 꾸준히 창출해 사업의 계속성을 확보한 것은 동방 항로를 개척한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였다.

1600년과 1602년에 각기 설립된 양국의 동인도 회사는 의도한 사업의 내용은 물론 국왕으로부터 특허장을 받아 주식 발행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해 출자자를 모집한 것까지 유사했다. 주식회사의 창시는 국가와 투자자 간의 이해관계가 합치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국가로서는 민간 자본을 중상주의와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이용하고 이들이 벌이는 사업이 성공할 경우 세금 수입을 거둘 수 있으므로 이익이었다. 또 투자자 입장에서는 위험 부담이 출자금에 제한되면서 높은 배당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큰 매력이었다.

이렇게 정치적 이해와 민간 자본의 이해가 일치해 주식회사라는 새로운 형태의 실험이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주식회사 제도가 순조롭게 확산된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전까지 사업 전개의 주된 방식은 주식회사가 아니라 파트너십이었다. 파트너십은 소수의 투자자들이 모여 폐쇄적인 형태로 회사를 결성하고, 주식을 공개적으로 거래하지 않으므로 자본력이 큰 회사를 키우기에는 부적합하다.

그럼에도 파트너십이 왕성하게 사용된 까닭은 18세기 초 영국에서 남해 회사(South Sea Company)가,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미시시피 회사(Compagnie du Mississippi)가 주가 거품을 일으키고 도산하는 초대형 스캔들이 발생한 후 주식회사 제도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분출했기 때문이다.

 

■ 18세기 초 주식회사 거품 ■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 절대 왕정은 빈번한 전쟁 수행과 방만한 재정 운영으로 파탄 상태에 처했다.

1715년 루이 14세가 죽은 뒤 재정 재건의 중책을 맡은 것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 로(John Law)였다.

도박 경험이 풍부했던 로는 가치의 근원이 물건의 본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희소성의 가치를 사람들이 믿도록 하는 데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로선 파격이었던 지폐를 발행해 경제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리고 프랑스 정부를 설득해 1716년 지폐 발행권을 갖는 방크제너랄(Banque Generale)을 설립했으며 동시에 프랑스 식민지였던 루이지애나의 개발권을 갖는 미시시피 회사를 설립했다.

로는 작전을 개시했다. 미시시피 회사는 방크제너랄로부터 지폐를 대량 차입해 재정난으로 인해 헐값이던 프랑스 국채를 사들였다. 그리고 국채를 판 사람들에게 지폐를 나눠 주었고, 이들은 그 돈으로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을 매입했다.

이로써 많은 사람들은 헐값의 국채와 가치 상승이 기대되는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을 스와프 하는 것이 가능했다. 즉 오늘날의 금융 기법 중의 하나인 부채·주식 스와프(debt-to-equity swap)가 로에 의해 개발된 것이다.

 

로가 개발한 은행(지폐)·국가(국채)·사업(주식)의 연계 구조는 매우 성공적이어서, 미시시피 회사의 주가가 단기간에 10배 이상 뛰어올랐다. 투자자들은 환호했고 정부는 국가 부채 문제를 일거해 해결했다.

이렇게 모두가 승자가 되자 프랑스 정부는 로를 재무 장관으로 기용했다. 그러나 이후의 사정은 순탄치 못했다. 

미시시피 회사가 벌인 사업마다 모두 적자에 허덕이더니 국채의 이자 수입만 남았을 뿐이었다.

마침내 1720년 불안을 느낀 미시시피 주식회사의 주주들이 주식을 처분하기 시작했고, 주식 매각 대금으로 받은 지폐를 즉각 금으로 태환 하려는 행렬이 이어졌다. 이에 주가는 폭락했고 지폐는 휴지로 전락했다. 

마침내 사기꾼으로 몰린 로는 구사일생으로 프랑스를 탈출했다. 프랑스에서 로가 활약하고 있던 시절, 그의 기발한 사업 방식이 영국에 전해져 유사한 기획 사기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남해 회사 거품 사건이다. 미시시피 회사와 마찬가지로 남해 회사에도 뚜렷한 비즈니스 모델이 없었다. 남해 회사는 영국 정부의 국채를 인수해 주는 대신에 남해(남아메리카 근해) 지역에 대한 무역의 독점권을 얻었으며, 동시에 주식 발행가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특권도 얻어냈다. 

이로써 100 파운드의 액면가로 3만 주를 발행하면 300만 파운드의 국채를 매입할 수 있지만, 200파운드의 시가로 3만 주를 발행하면 300만 파운드의 국채를 매입하고도 300만 파운드의 여유 자금이 생겼다. 남해 회사는 이를 원자로 여러 사업을 벌였다.

 

그런데 초창기에 시도한 노예 무역이 항해 중 노예들의 높은 치사율로 인해 이익을 내지 못하자, 회사는 톱밥으로 목재를 만든다거나 납에서 은을 추출한다거나 바닷물에서 식수를 뽑아낸다는 등 온갖 사기성 아이디어를 홍보했다.

그럼에도 회사의 주가는 꾸준히 올랐고 회사는 신주를 시가 발행해 모집한 자본을 주주들에게 배당금으로 나눠 주었다. 일종의 폰지 사기(Ponzi scheme)가 시작된 것이다.

투자자들 중에는 사업 내용에 의구심을 갖는 자들도 있었지만 주가가 계속 올라가는 한 되팔아 이익을 실현할 수 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러나 주모자인 회사의 이사와 경영자들이 1720년 여름 주식을 처분하면서 주가 폭락이 시작되어 2개월 만에 주가가 무려 80%나 빠졌다. 희생자 중에는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였던 아이작 뉴턴(lsaac Newton)도 포함되어 있었다. 뉴턴은 "나는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지만 인간의 광기는 알 수 없다."라며 탄식했다. 이 사건 이후 영국 의회는 거품 법을 제정해 주식회사 설립을 금지했다.(거품 법은 1825년이 되어서야 폐기되었다.)

 

※ 폰지 사기 

폰지 사기란 말은 1925년 미국의 사기범 찰스 폰지(Charies Ponzi)의 범행 수법에서 연유했다. 개발 붐이 한창이던 이설 폰지는 플로리다에서 90일 내 원금의 2배 수익 보장을 내세우며 8개월 만에 4만여 명으로부터 1500만 달러를 끌어모았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는 아무런 사업도 벌이지 않았다.

즉 폰지 사기는 신규 투자자의 돈으로 기존 투자자에게 이자나 배당금을 지급하는 다단계 금융 사기를 상징하는 말로, '폰지 게임'이라고도 한다.

 

728x90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