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728x90
반응형
BIG

헤지 펀드의 시장교란 사례들 1

1992년 파운드 위기

헤지 펀드가 언론으로부터 집중적인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992년 조지 소로스(George Soros)가 이끄는 퀀텀 펀드(Quantum Fund)가 파운드화의 고정 환율을 지키고자 했던 영국은행을 무릎 끓게 한 투기적 공격 사건이 터진 직후였다.

1992년 9월 영국은행은 유럽통화제도(European Monetary System, EMS)의 중심 기구인 환율조정메커니즘(Exchange Rate Mechanism, ERM)에서 탈퇴한다고 전격 선언 했다.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전 세계가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유럽연합의 EMS 참가국들은 1999년까지 유로화를 창시해 단일 통화권을 구춘한다고 목표를 세우고 과도기적인 조치로 일종의 준고정환율제인 ERM을 작동시키고 있었다.

ERM은 가맹국 통화 간의 기준 환율을 설정했는데, 이때 기축 통화의 역할을 한 것은 유럽에서 가장 안정적인 통화인 독일 마르크스화였다.

예컨대 독일 마르크스와 영국 파운드 간의 시장 환율은 기준 환율의 상하 6% 변동 폭 내에서만 움직일수 있었다. 만약 파운드의 가치가 마르크에 대해 변동 폭 아래로 떨어지는 징후가 나타나면 영국은행은 손해를 무릅쓰고라도 의무적으로 외환 시장에 개입해 파운드를 사들임으로써 환율이 변동 폭을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했다.

 

만일 외환 시장에 개입해도 기준 환율을 유지할 수 없을 경우에는 ERM 회원국 회의를 소집해 기준 환율을 다시 설정해야만 했다. 그런데 기준 환율의 재설정은 당사국의 거시 경제 관리가 실패했음을 대내외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므로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파운드의 절하는 동·서독이 통일된 시점에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1990년 통일을 달성한 독일은 낙후된 동독 경제를 되도록 빠른 시일 안에 회복시키고자 휴지 조각에 불과한 동독 화폐를 마르크로 바꾸어 주는 한편 동독지역에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했다.

돈이 마구 풀려 나가자 독일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Bundesbank)는 인플레를 막기 위해 통일 후 2년 동안 10여 차례에 걸쳐 금리를 올리는 식으로 고금리 정책을 채택했으며, 이 정책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어 이 기간 중 독일의 인플레는 연 2.5%에 머물렀다.

 

그런데 자본 자유화가 이뤄진 상황에서는 돈은 더 높은 금리를 보장하는 나라로 이동하는 속성이 있다. 따라서 독일의 고금리는 국제 자본을 대거 독일로 빨아들였으며, 국제 자본이 마르크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마르크의 가치는 더욱 올라갔다. 

이는 다른 유럽 국가들의 통화가 마르크에 대해 급격히 절하되는 것을 의미했다. 즉 다른 통화들은 ERM에서 설정한 기준 환율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다. 이 상황에서 다른 나라들은 기준 환율을 유지할 목적으로 금리 인상을 시도했지만, 금리 인상에는 경기 하락이 수반 한다는 문제점이 뒤따랐다.

가뜩이나 경제 사정이 어려웠던 유럽 각국은 분데스방크를 뒤따라 고긐리 정책을 시행한 결과 실업률이 두자릿수를 넘어서는 등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어야 했다.

1992년 9월 유럽 각국의 체력은 마침내 한계에 봉착했다. 9월 8일 핀란드가 마르크와 자국 통화 간의 연동제를 폐기한 데 이어 스웨덴은 자국 통화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단기 금리를 무려 다섯 배나 올렸다.

이탈리아의 리라와 스페인의 페세타가 먼저 폭락했고 영국의 파운드도 마침내 대폭락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존심이 강한 영국은행은 처음에는 외환 보유고를 방출해 파운드를 사들이고 단기 금리를 10%에서 15%로 대폭 인상함으로써 파운드의 폭락을 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질풍노도처럼 밀려오는 국제 핫 머니의 물량 공세에는 도저히 당할 수가 없었다. 국제 핫 머니는 "파운들을 팔고 마르크를 사자." 라는 주문을 외환시장에 계속 발신하면서 파운드 폭락을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 

당장 파운드를 빌려 팔고 나중에 파운드가 절하된 다음에 다시 사서 갚는 식으로 파운드 공매도(short sales)를 실시하면 앉은자리에서 엄청난 환차익을 거둘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영국은행의 입장에서 이를 막을 수 있는 수단은 금리를 추가로 인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럴 경우 가뜩이나 부진한 경기가 더욱 곤두박질칠 우려가 있었다. 영국 국민들은 존 메이저(John Major) 총리에게 "차라리 ERM에서 탈퇴하라."라고 요구했다. 결국 유럽통합주의자인 메이저 총리는 국내의 거센 정치적 압력에 굴복해 ERM 탈퇴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검은 9월(Black september)' 사태였다.

 

검은 9월 사태로 인해 이름을 떨친 것은 소로스였으며, 그간 베일에 싸여 있던 헤지 펀드라는 특종펀드가 인구에 회자되었다. 소로스의 퀀텀 펀드를 의시한 헤지 펀드들은 파운드 공매도라는 투자기법을 사용했다.

이들은 영국이 ERM의 고정 환율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파운드를 대거 빌려 외환 시장에 내다 팔아 파운드의 절하를 압박했다. 헤지 펀드는 영국 정부가 외환 보유고에도 한계가 있고 고정 환율을 지키기 위해 금리를 올리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정확히 판단하고 있었다.

결국 영국은 ERM에서 탈퇴했고 이들은 파운드를 싸게 매입해 공매도 포지션을 청산함으로써 막대한 환차익을 거두었다.

소로스는 청년 시절 공산 치하의 헝가리에서 영국으로 이주해 런던 정경대학교(LSE)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다시 미국으로 넘어가 월스트리트에서 기반을 잡은 인물이었다.

그는 파운드 위기로 명성을 얻은 후 날카로운 분석력과 엄청난 자본 동원력을 바탕으로 금융 시장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각국의 중앙은행 총재와 국제 통화기금(Internation Monetary Fund, IMF)의 최고위층은 핫라인을 통해 그와 친분을 맺고자 했다.

외환 위기의 와중에서 대통령에 당선한 김대중은 당선자 시절이던 1998년 1월 소로스를 동교동 자택으로 초청해 그의 자문을 구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1998년 홍콩 위기

1997년 동아시아 외환 위기가 발발했을때 당시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모하마드(Mahathir Mohamad)총리는 헤지 펀드를 악으로 규정해 큰 관심을 끌기도 했다. 파운드 위기 이후에도 이처럼 헤지펀드는 외환 위기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되곤 했다.

헤지 펀드가 외환 위기를 촉발한 사례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1998년 홍콩 달러 위기였다.

홍콩은 미국의 보수적인 싱크탱크인 해리티지재단(Heritage Foundation)이 줄곧 경제 자유 지수(econmic feedom index)의 최고 점수를 부여할 정도로 자유 시장 경제학의 교리를 충실히 따르는 모범적인 도시 국가였다. 그런데 홍콩의 통화 제도는 특이해서, 과거 영국 식민지 시절의 유산인 통화위원회(currency board) 제도를 그대로 운용하고 있었다.

통화위원회 제도는 원래 식민지 본국이 식민지의 통화를 관리하는 방식인데, 통화 당국인 홍콩통화관리국(Hong Kong Monetary Authority, HKMA)은 미국 달러를 준비 통화로 채용하는 방식으로 이 제도를 운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홍콩통화관리국이 발행할 수 있는 홍콩 달러의 통화량은 미국 달러의 비축고 내로 엄격히 제한 되었다. 이 제도는 홍콩 달러의 환율을 안정시켜 홍콩 달러의 환율을 안정시켜 홍콩이 무역, 금융, 투자의 중심지가 되는 데 크게 기여해 왔다.

그러나 1998년 여름 홍콩 달러는 그 전해 발생한 동아시아 외환 위기의 여파로 절하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이 사정이 바로 헤지 펀드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헤지 펀드는 특정국 정부가 특정한 환율 목표를 지키고자 할 때 이를 공격해 크게 환차익을 거두는데 응숙한 수완을 보여 왔다.

1992년 영국 파운드 위기 때도 그랬고, 1997년 태국 위기 때도 경제의 기초적 조건에서 벗어난 고정 환율이 해지 펀드의 공격 타킷이 되었다. 마침 홍콩 외환 시장에는 소로스의 퀀텀 펀드, 줄리언 로버트슨(Julian Robertson)의 타이거 펀드(Tiger Fund)등 유력 헤지 펀드들이 일전을 불사할 각오로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홍콩에서 헤지 펀드들이 구사한 전략은 주식 시장과 외환 시장을 동시에 묶어 공략하는 작전이었다. 

우선 헤지 펀드들은 금융 기관으로부터 홍콩 기업들의 주식을 빌려 시장에 내다 팔아 주식 쇼트 포지션을 만들었다. 

그리고 주식을 팔아 마련한 홍콩 달러를 외환시장에서 매각하고 달러를 사들여 달러 등 포지션을 만들었다. 헤지 펀드의 노림수는 주식 시장이든 외환 시장이든 적어오 어느 한쪽에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주식의 대량 공매도는 주식시장의 가격 하락을 압박했고 달러의 대량 매입은 홍콩 달러의 평가 절하를 압박했으므로 시장 사정은 헤지 펀드에 유히했다.

따라서 홍콩 통화 당국이 고정 환율을 포기할 경우에는 홍콩 달러가 평가 절하되어 달러 롱 포지션에서 돈을 벌 수 있고, 홍콩 통화 당국이 고정 환율을 지키고자 이자율을 높일 경우에는 주가가 폭락해 주식 쇼트 포지션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절묘한 구조가 만들어졌다.

이때 헤지 펀드들이 물량 공세에만 의존하지 않고 언론사를 광범위하게 접촉해 홍콩 달러의 평가 절하가 임박했다는 루머를 확산시킨 결과 시장의 불안은 크게 고조 되었다.

 

마침내 홍콩 기업들까지 가세해 홍콩 달러를 팔고 달러를 사들이는 패닉 현상이 빚어졌다. 당시 헤지 펀드들이 비밀리에 음모해서 가격을 조작했다는 구체적인 증거까지 없었지만, 이들이 서로 간에 눈빛으로 사인을 주고 받았을 가능성은 농후했다.

이에 홍콩 통화 당국은 매우 과격하고 이례적인 방식으로 대응했다. 당국은 막대한 외환 보유고를 풀어 외환 시장에서 홍콩 달러를 사들여 홍콩 달러의 환율을 지지하고 동시에 거둬들인 홍콩 달러를 주식 시장에 투입해 주가를 끌어올렸다.

이로써 주식을 쇼트 포지션으로 가져갔던 헤지 펀드는 대규모 손실을 보게 되었다. 홍콩 정부의 이 같은 시장 개입은 헤지 펀드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다.

자유시장을 모토로 동아시아의 허브 역할을 자임해 혼 홍콩 정부가 고강도로 시장에 개입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홍콩 통화 당국은 주식 공매도를 금지하는 비상 규제를 발동했고, 이로 인해 헤지 펀드에게 주식을 빌려 준 금융 기관들은 즉각 포지션을 해소해야 했으므로 헤지 펀드는 막대한 규모의 손실을 입게 됐다.

이처럼 홍콩 당국의 이럐적이며 반시장적인 조치로 홍콩은 외환 위기를 간신히 모면했으나 명성은 크게 훼손되었다.

시카고학파의 창시자이자 자유 시장 경제학의 대부인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은 "홍콩 정부가 미쳤다." 라며 분노하기도 했다.

 

728x90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