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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경제

혁신은 투자은행의 DNA

블랙데블 2022. 5. 4.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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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은 투자은행의 DNA

 

투자은행업계가 양자 구도로 재편된 후 서로 경쟁하면서 혁신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투자은행의 DNA는 혁신이며, 투자은행가들은 이 '혁신'을 가리켜 문제 해결 능력이라고 말한다. 초창기에 이뤄진 혁신 중 첫 번째가 신디케이트(syndicate)의 구성입니다. 증권 인수 후 물량 소화에 실패할 경우 리스크가 엄청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투자은행은 공동으로 인수단을 구성해 인수 물량을 분담, 소화하기 시작했다. 인수 안건이 생기면 주간사(lead manager)를 지정해 대표로 발행사와 가격 협상을 벌이고, 인수에 성공하면 가까운 투자은행들을 인수단에 초청하는 호혜주의(reciprocity) 관행이 이때부터 형성되었다.

또 하나의 금융혁신은 고객 기업의 성과에 의해 자신들의 업적이 좌우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투자은행이 고객 기업의 이사회에 이사를 파견하는 방식으로 고객 기업의 재무적인 문제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한 점이다. 기업들은 당연히 불편했지만 재원 조달이 수월해지고 자본 비용이 낮아지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고객 기업과의 높은 수준의 결속은 한편으로는 다른 투자은행이 진출 할 수 없도록 일종의 진입 장벽을 쌓는 효과를 낳는 것이기도 했다.

 

세 번째의 금융 혁신은 부실기업 구조 조정이라는 재무적 자문(financial advisory) 업무를 개척한 것이다. 철도 건설 붐이 파열하면서 미국의 철도 회사들은 과잉 투자와 부채로 몸살을 앓게 되었다. 그런데 19세기 말에는 기업 파산법이 없었으므로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대안이 마땅치 않았다. 그러던 중 투자은행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파산 제도를 실험하기 시작했다. 투자은행은 법원에 관재인(conservator) 파견을 의뢰하고 관재인의 명령으로 저당권의 행사를 동결하는 등 외견상 법원이 주도하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그러나 구조 조정의 실질적인 권한은 어디까지나 배후의 투자은행이 쥐고 있었다. 투자은행은 채권자와 주주를 모두 참여시켜 구조조정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들 간의 타협을 배후에서 압박함으로써 구조 조정안에 대한 합의를 도출했다.

 

이런 구조 조정 자문 서비스는 투자은행에 매력적인 돈벌이 기회를 제공했다. 구조조정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부실 회사의 자산 및 부채를 신설 회사로 이전했는데 투자은행이 실무를 담당했으므로 자문 수수료 수입이 발생했고, 또 신설 회사가 인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증권을 발행해야 했으므로 주간사(lead manager) 역할을 통해 인수 수수료도 벌어들였다.

 

19세기 말의 마지막 금융 혁신은 기업 인수·합병이었으며, 이를 주도한 것은 당시 금융계의 대부인 모건이었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설립한 에디슨 제너럴 일렉트릭(Edison General Electric)이 1892년 톰슨휴스턴(Thomson-Houston)과 합병해 GE를 설립한 것도 모건의 자문에 다른 것이었다.

1895~1904년에 투자은행의 자문을 받아 약 1800여 개의 회사가 합병했으며, 그 결과 US 스틸(U.S. Steel), 인터내셔널 하비스터(International Harvester), 피츠버그 플레이트 글래스(Pittsburgh Plate Glass Company), 아메리칸 캔(American Can), 아메리칸 스멜팅 앤드 리파이너리(American Smelting & Refinery) 등 미국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거대 기업이 등장하게 되었다.

 

투자은행 증시 폴락의 주범으로 몰리다.

 

거대 산업 자본과 금융 자본의 독점적인 파워가 커지면서 이들을 견제하려는 진보적 정치·사회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런 진보적 운동은 미국 사회의 중심적인 정치 세력으로 자리 잡는 데 실패했다.

미국의 사상적 기조나 국민 정서는 어디까지나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쪽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토양에서 미국의 자본 시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특히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교전 각국이 미국에서 전쟁 자금을 조달했으므로 미국의 자본 시장은 강하게 성장 탄력을 받았다. 1920년대는 '포효하는 20년대(Roating Twenties)' 라는 말이 상징하듯이 경제 성장과 금융의 폭주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1929년 10월 24일 뉴욕 증시가 대폭락했다. 당시 거시경제학, 금융경제학이 미처 발전되어 있지 못한 상태에서 정부 당국은 우왕좌왕하며 실책과 졸속으로 대응했다. 그 결과 증시 폭락 사태가 일파만파로 확대되어 은행의 연쇄 도산을 부르고, 이것이 실물 경제를 얼어붙게 함으로써 대공황(Great Depression)을 야기하고 말았다. 이에 혼비백산한 정치권은 투자은행을 위기의 주범으로 지목하면서 1932년 페코라위원회(Pecora commission)를 구성해 조사를 펼쳤다. 당시 초미의 관심사는 투자은행이 주선한 신용 거래와 공매도가 증시 폭락에 어떻게 기여했는가를 밝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용 거래와 공매도가 시장의 유동성에 기여하는 바도 크다는 반론이 받아들여지면서 페코라위원회의 활동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단 조사 과정에서 투자은행의 날개를 잘라 버려야 한다는 비판 여론이 비등했으므로 이를 동력으로 1933년 뉴딜(New Deal) 금융 개혁 입법이 이루어졌다.

 

뉴딜 금융 개혁법 중에서 제일 먼저 제정된 것은 증권법(Securities Acs)이었다. 1933년에 제정된 이 법의 주된 취지는 발행자와 공시 의무(disclosure requirement)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증권 발행을 원하는 기업은 발행 내역을 감독 당국(1934년 이후에는 신설 감독 기관인 미국증권거래위원회 U.S. 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 SEC)에 등록하도록 의무화되었으며 냉각기간을 거쳐 허위 사실이 드러날 경우에는 발행 기업의 이사가 책임지도록 규정했다. 이어서 증권거래법(Securities Exchange Act)이 준비되었는데, 당초에는 중개인에 의한 딜링의 금지, 주식 거래에 대한 증거금 의무화 등 여러 가지 엄격한 규제가 포함되었으나, 그대로 가면 자본 시장의 자금 조달 기능이 마비되고 일부 주식은 매장될 것이라는 업겁의 반론이 제기되었다. 이를 계기로 1934년 완화된 형태의 증권거래법이 나오게 되었다. 세칭 글라스·스티걸  법이라고 알려진 은행법(Banking Act)은 1933년 마련되었다. 

 

이 법은 증권 자회사의 부실로 인해 은행의 도산 위협이 높아졌다는 문제의식하에서 은행에 의한 증권 자회사 설립을 불허했으며, 시스템 리스크를 줄일 목적으로 예금보험공사(Federal Deposit Insurance Corporation, FDIC)를 설립할 것을 규정했다. 그 결과 은행들은 은행업과 증권업 중 양자택일할 것을 강요받게 되었다. JP모건은 투자은행 부문을 잘라 내 모건스탠리로 분리했으며, 상업은행 부문은 모건 개런티(Morgan Guaranty)로 개명해 연준의 감독을 받게 되었다. 또 보스턴 소재 퍼스트 내셔널 뱅크(First National Bank of Boston)에서도 증권 자회사가 분리되어 퍼스트 보스턴(First Bonston)이 탄생했다.

그러나 글래스·스티걸 법은 본래 의도와 달리 상업은행의 활동을 제약함으로써 오히려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퍼스트 보스턴, 샐러 먼 브라더스(Salomon Brothers) 등 독립형 투자은행들이 독주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게 되었다.

 

신용 거래와 공매도

 

도매체 신용 거래와 공매도는 왜 1929년 뉴욕 증시 폭락의 주범으로 지목된 것일까?

신용 거래(buy on margin)란 문자 그대로 투자자가 주식을 매입할 때 대금의 일부를 브로커에게 빌려 진행하는 거래입니다. 투자자들이 신용 거래를 하는 까닭은 거래 후 주가가 오를 경우 자기 자본에 대한 수익률을 높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00달러짜리 주식 100주를 저액 자기 자금으로 샀는데 주가가 120달러로 올랐다면 투자 수익률은 20%가 된다. (2000/10000=20%) 그런데 주식 매입 대금 중 6000달러는 자기 자금이며 4000달러는 중개인으로부터 빌렸다면 투자 수익률은 33.3%가 된다. (2000/6000=33.3%) 이처럼 남의 돈을 일부 빌려 투자하면 전액 자기 자금으로 투자한 것에 비해 투자 수익률이 높아진다. 금융 경제학에서는 남의 돈을 빌려 투자하는 것을 가리켜 지렛대를 벌리는 것과 유사하다는 뜻에서 레버리지(leverage)라고 한다. 그러나 레버리지를 동원하는 것이 항상 높은 수익률을 동원하는 것이 항상 높은 수익률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앞의 예에서 주가가 예상과 달리 하락한다면 레버리지를 동원한 투자의 손실률은 전액 자기 자본을 사용한 투자자의 손실률보다 커진다. 예를 들어 가격이 100달러에서 80달러로 하락하면서 앞서 전액 자기 자금으로 투자한 경우와 투자 자금 중 4000달러를 빌린 경우의 변동률인 각각 20%와 33.3%은 고스란히 손실률이 된다. 이처럼 레버리지 투자는 고위험, 고수익률을 추구하는 투자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신용 거래를 원하는 투자자는 브로커에게 소정의 증거금(margin)을 쌓아야 한다. 증거금에는 거래를 개시하는 시점에 불입해야 하는 초기 증거금(initial margin)과 거래 기간 중에 최소한으로 유지해야 하는 유지 증거금(maintenance margin)이 있다. 그리고 증거금 계좌의 잔액이 유지 증거금 밑으로 내려갈 경우 즉각 초기 증거금 수준으로 잔액을 보충할 것을 요구하는 마진콜(margin call)이 발동한다. 마진 콜이란 축구의 옐로카드와 마찬가지로 매우 위헙적인 벌칙이다.

 

아펀 예의 연장에서, 투자자가 100달러짜리 주식 100주를 사기 위해 브로커로부터 4000달러를 빌렸으며, 초기 증거금 비율은 60%이고 유지 증거금 비율은 50%라고 합시다. 

신용 거래를 위해 투자자가 불입한 자기 자금은 6000달러이므로, 주식 매입 대금 중 자기 자금 비율을 충족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주가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주가가 80달러가 되면 투자 포지션의 가치는 1만 달러에서 8000달러로 줄어드는데 대출로 동원한 4000달러는 그대로이므로 자기 자금 비율이 60%에서 50%로 떨어진 셈이 되어 간신히 유지 증거금 비율 50%를 충족하게 된다. 따라서 주가가 80달러에서 1센트라도 떨어질 경우에는 마진 콜이 발생하게 되며, 그럴 경우 투자자는 자기 자금 비율을 초기 증거금 비율인 60% 수준으로 높여야 한다.

 

이처럼 신용 거래로 주식을 매입한후 주가가 낮아져 유지 증거금 비율을 맞추지 못하게 되면 마진 콜이라는 폐 널 티가 발동하며 투자자는 시급히 현금을 마련해 증거금 잔액을 높여야 한다. 이것이 여의치 못할 때는 신용 거래로 사들인 주식을 급하게 처분하게 되는데, 이런 급매 물량이 클 경우 주식 시장의 폭락을 초래할 수 있다. 신요 거래가 증시 폭락의 주범이라느 비난을 받은 것은 바로 이러한 마진 콜 발동에 따른 급매의 가능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해 생각해 보면 주식 시장이 침체되어 거래가 매우 부진한 상황에서는 신용 거래가 주식을 매입할 수 있는 자의 폭을 넓혀 주므로 시장의 유동성을 높이는데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한 측면만을 보고 신용 거래를 일방적으로 죄악시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공매도(short selling)란 투자자가 브로커로부터 주식을 빌려 팔고 나중에 주식으로 되갚는 거래를 말한다. 공매도는 얼핏 투자의 일반 상식에 반하는 것으로 보인다. 흔히 주식시장에 투자한다고 하면 주가가 오를 것라는 기대를 갖고 주식을 사는 경우만을 생각하는데 공매도는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즉 주가가 떨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주식을 빌려 판 후 주가가 실제로 떨어지면 싼값에 주식을 사서 대갚음으로써 차익을 얻는 거래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공매도는 주식 시장이 하강하는 국면에 거래가 활발해지는 특성이 되었으며, 그로 인해 주가의 하락을 더욱 부추길 수 있다. 공매도 역시 바로 이런 이유로 뉴욕 증시 폭락의 원인으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공매도 역시 아무도 주식을 팔려하지 않을 때 주식을 팔려는 자의 폭을 넓혀 시장의 유동성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으므로 무작정 죄악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신용 거래와 공매도를 규제할 것인지 시장에 그대로 맡겨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공방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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