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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의 혼란에도 머니 게임을 즐기는 투자은행

 

유럽의 명문 은행가였던 나탄 메이어 로스차일드(Nathan Mayer Rothschild)는 유럽 각국 왕실에 재정을 지원할 정도로 금융력이 막강했다. 로스차일드가 나폴레웅 전쟁의 막바지였던 1815년 프랑스군을 이끄는 나폴레웅과 영국군을 이끄는 웰링턴이 맞붙은 워털루 전투에서 누가 승리할 것인가를 놓고 도박을 걸었다. 그렇다고 리스크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식의 도박은 아니었다. 로스차일드는 전선에 통신원을 배치해 전투 상황을 실시간으로 점검하고 웰링턴이 승기를 잡았다는 사실을 미리 알아차렸다. 그럼에도 보유하고 있던 영국 관련 주식을 런던 증시에 내다 팔아 마치 나폴레옹이 승리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했다. 로스차일드가 주식을 처분하고 있다는 뉴스가 빠른 속도로 퍼지면서 런던 장세는 더욱 폭락했다. 마침내 가격이 충분히 빠졌다고 판단한 로스차일드는 주식을 재매 집하기 시작했고 다음 날  웰링턴의 승전보가 날아들면서 주가가 폭등에 막대한 시세 차익을 얻었다.

 

1861년에 시작된 미국 남북 전쟁 당시 북의 연방 정부는 파산 상태였다. 전쟁으로 인해 재정 지출이 폭증하는 데 재원 조달은 여의치 않았다. 그러나 당시 연방 정부는 인쇄기로 돈을 찍어내지 않고도 전비를 조달할 수 있었는데, 이는 순전히 제이 쿡(Jay Cooke) 덕분이었다. 쿡은 연방 정부에 돈을 빌려 줄 의사가 없던 월스트리트의 은행들을 제치고 일반인들에게 국채를 직접 판매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국채를 50달러, 100달러의 소액권으로 발행해 일반 시민도 국채를 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애국심에 호소하는 광고 전략까지 효과를 거두어 쿡은 무려 10억 달러가 넘는 국채를 소화시켰다. 이는 연방 정부가 지출한 전비의 3분의 2에 육박하는 금액이었다. 이처럼 북이 남북 전쟁에서 승리한 배경에는 쿡의 머니 게임(money game)이 있었다. 로스차일드와 쿡의 일화는 혼탁한 정세나 불안한 안보 상황에 기민한 정보력과 뛰어난 창의력으로 대응하면서 머니 게임을 벌이는 투자은행의 속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실 현대 자본주의의 전개 과정을 논하면서 투자은행의 역할을 빼놓을 순 없다.

신생국 미국이 막대한 인프라 투자를 통해 신대륙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도 투자은행이 유럽에서 거대한 자금을 끌어다 댔기 때문이고, 제국주의 일본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것도 러시아의 유대인 학살에 반감을 가진 유대계 투자은행인 쿤뢰브(Kuhn, Loeb & Co)가 일본이 런던 금융 시장에서 국채를 발행해 전비를 조달할 수 있도록 주선했기 때문이다.

 

 

투자은행업은 왜 미국에서 발전했는가?

 

미국에서 투자은행업이 발전한 것은 막대한 자본 수요 덕이었다. 미국은 1830년대의 철도 건설 붐, 1846~1848의 멕시코 전쟁, 1861~1865년의 남북 전쟁을 겪으며 자금 수요가 막대했다. 그러나 자본 축적이 일천했던 미국은 유럽으로부터 재원을 조달할 수밖에 없어 19세기 내내 자본 수입국이었다.

당시 자금 조달의 주요한 수단은 채권 발행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자국 국채와 유럽 자본을 연결해 주는 교량 역이 필요했다. 한편 19세기 후반에 주식회사 설립 붐이 일었던 것도 주식 시장의 발전을 자극했다. 영국에서는 주식회사 설립이 정부로부터 특별 허가를 받아야 하는 일종의 특혜라는 인식이 남이 있었지만, 미국에서는 작은 정보의 원칙하에 주식회사가 활발하게 설립되었다.

이처럼 민간 주도로 자본 시장이 크게 활성화되면서 투자은행이 발전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 되었다. 투자은행은 정부나 철도회사의 채권 발행을 주선하던 일에 민간 기업의 주식 발행을 주선하는 쪽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했다. 그밖에도 과잉 부채와 과잉 투자로 부실화한 철도 산업에 대한 구조 조정을 진두지휘했으며, 1893년 공황 이후에는 철강, 기계, 화학 등 주요 산업 분야에서 자금난에 처한 기업들 간의 인수·합병을 기획했다. 이것이 인수·합병 자문 업무의 시발점이었다.

 

미국적 가치관도 투자은행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정치인들은 작은 정부가 경제 성장에 최선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하며, 사적 영역이 경제 발전을 주도할 수 있도록 사유 재산권과 계약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믿었다.

법률가들도 계약은 어디까지나 당사자 간의 자발적인 의사 표현이므로 국가가 그 타당성을 사후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며 계약의 자유를 증시했다. 심지어 국가가 민간의 계약을 침해할 경우 사유 재산을 수용(收用, expropriation) 한 것으로 간주해 적절한 보상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정치권과 법조계의 민간 중시, 시장 중시 태도는 19세기 후반 대륙 횡단 철도가 완성되고 북미 대륙이 하나의 전국적인 시장을 형성하게 되면서 태동한 대규모 산업 자본의 이해를 대변한 것이기도 했다.

 

 

투자은행 유대계와 앵글로·색즌계로 이원화하다.

 

19세기 중반 몇 차례 공황과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미국의 투자 은행업계는 유대계와 앵글로·색슨계라는 이원화된 구조를 드러냈다. 유대계 투자은행의 계보는 독일계 유대인들이 만들어 갔다. 당시 유럽에서는 로스차일드가 유대계 금융 자본의 맏형 노릇을 했지만 미국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로스차일드는 미국의 연방체가 가 근본적으로 위태롭다고 내다보면서 미국의 장래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탓에 미국에 대해 소극적인 투자로 일관한 결과 19세기 후반 이후 지위가 격하되었다. 그 대신 독일 바이에른 지방 출신의 유대 자본인 셀리그먼(J·&·w. Seligman & Co.)과 1867년에 창업한 쿤뢰브가 유대계 투자은행의 맹주로 등장했다. 리먼브라더스와 골드만삭스도 각기 1850년 1872년에 창업해 이 대열에 합류했다.

이들 유대계 투자은행들은 혈연관계와 문화적, 종교적 동질성을 토대로 끈끈한 네트워크를 형성했으며, 이로 인해 배타적 클럽과도 같은 업계의 관행이 만들어졌다.

 

다른 하나의 줄기인 앵글로 색슨계는 뉴잉글랜드 지방의 영국계 이민자들이 설립한 투자은행들이다. 당초 앵글로·색슨계 투자은행으로서 미국에서 크게 활약한 것은 베어링(Baring)이었으나, 로스차일드와 마찬가지로 베어링은 어디까지나 유럽에 뿌리를 둔 금융 자본으로서 신흥 미국 시장의 거대한 증권 물량을 소화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내에서 앵글로 · 색슨계 토착 금융 자본이 형성되었는데 그 대표가 JP모건이다. JP모건을 창업한 존 피어폰트 모건은 아버지의 주도면밀한 주선으로 젊은 시절 런던에서 외환, 채권 인수 등 금융의 실무를 익혔다. 그는 1895년 사업의 본거지를 런던에서 뉴욕으로 옮기고 JP모건을 미국 시장과 유럽 자본을 연계하는 대표적인 투자은행으로 키웠다. 

이외에도 보스턴에서 1848년과 1865년에 각각 창업한 리 히긴슨(Lee Higginson)과 키 더 피바디(Kidder Peabody)도 빠르게 부상해 JP모건과 함께 앵글로 · 색슨계의 빅(Big 3)을 형성했다.

 

이들 투자은행은 유대계든 앵글로 · 색슨계든 공히 파트너십(partnership)이라는 조직 형태를 취했다. 파트너십은 주식을 공개적으로 거래하지 않으므로 자본력을 키우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투자은행이 파트너십을 선호한 것은 고객 기밀을 다워야 하는 업의 특성상 기업 공개를 하지 않는 것이 좋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식회사 형태로 증권 자회사를 설립하는 방식으로 투자은행업에 진출한 상업은행도 있었다. 그 대표가 오늘날의 뉴욕 은행인 퍼스트 내셔널 뱅크(First National Bank of New York)와 시티 그룹의 모체인 퍼스트 내셔널 시티 뱅크(First National City Bank of New York)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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