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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2부

 

영국은행은 원래 민간기업이었다.

 

중앙은행의 모습을 최초로 완성시킨 것은 영국은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논했듯이 18세기까지만 해도 영국은행의 주된 역할은 정부에 대한 재정 지원을 위주로 하는 정부의 은행에 국한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부가 영국은행에 국채를 판 대가로 받은 영국은행의 은행권(지폐)으로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구입했기 때문에 영국은행 은행권이 저절로 화폐로서 광범위하게 유통되었습니다. 게다가 영국은행 은행권은 금과 태환성을 보장했으므로 그 통용성이 높았습니다. 또 영국은행은 런던 금은 세공업자들이 은행가로 진화하는 동안 그들에게 예금계좌를 제공함으로써 은행 간의 결재를 지원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은행의 은행'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한편 18세기에는 민간은행 대부분이 수취한 예금에 대해 예금 증서를 발행해 이것이 은행권으로 유통되면서 은행권 난립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이 때문에 1833년 영국은행의 은행권에 법화의 지위가 부여되었고 1844년에는 발권 능력이 영국은행에 집중 되었습니다. 이로써 영국은행은 정부의 은행, 은행의 은행, 발권 은행의 3대 기능을 수행하는 현대적인 모습의 종앙은행으로 진화했습니다. 영국은행의 은행권은 이후로도 금에 의해 지지를 받는 본위 화폐였지만 20세기 들어 금본위제가 폐지되고 관리 통화재로 바뀌면서 영국은행도 불태환 지폐를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통화 증발의 문제가 제기되었으므로 통화량 조절을 통해 물가 안정을 도모하는 통화 신용 정책의 수행이 영국은행의 핵심기능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기능이 더해지면서 영국은행은 민간 주식회사에서 공조직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1946년 영국은행의 국유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 중앙은행이라고 하면 당연히 공조직이라고 생각하지만 역사적 진화 과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중앙은행 설립이 늦어진 이유

 

오늘날 글로벌 금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ve System '연준')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중앙은행 설립 과정은 그다지 순조롭게 못했습니다. 연준이 창설된 것은 1913년으로, 영국(1694), 스웨덴(1656), 프랑스(1800)는 물론, 독일(1876), 일본(1882), 스위스(1907)에 비해서도 상당히 뒤늦은 것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주의 권한이 막강한 미국에서는 주 정부와 연방 정부가 각각 별도로 은행 인가권이 있어 주 인가 은행과 연방 인가 은행으로 은행의 설립을 이원화해 왔습니다. 특히 주 인가 은행들이 난립했으므로 연방 차원에서 은행 감독권을 갖는 중앙은행의 설치에 대해 주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것이 미국에서 중앙은행의 설립이 지연된 주원인이었습니다. 미 건국 직후 중앙은행을 설립하려는 시도가 있기는 했습니다. 연방주의자들은 영국은행과 같은 중앙은행의 설립이 꼭 필요하다고 보고 1791년에 면허 기간이 20년인 제1합중국은행(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을 설립했습니다. 그러나 20년 뒤 주권주의자들의 반대로 면허 갱신이 이뤄지지 않아 제1합중국은행은 소멸되었습니다. 1816년에도 제2합중국은행(Second Bank of the Ubited States)이 설립되었으나 이 역시 20년이 지나 면허 기간이 종료되면서 폐지되었습니다. 이후 중앙은행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습니다. 어떤 은행이건 일정한 법률적 요건만 갖추면 자유롭게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1864년 연방은행법이 제정되어 자본금 요건을 포함해 은행 설립 자격이 크게 완화됐습니다. 이때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시기를 '자유 은행업(free banking)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금융의 자유가 판을 쳤습니다. 당시 수많은 은행이 설립되고 각양각색의 은행권이 발행되었습니다. 발행 은행의 신용도가 달라 은행권들이 서로 대등하게 교환되지 않았고 신용이 떨어지는 은행이 발행한 은행권에는 할인율이 적용되었습니다. 이처럼 은행권이 난립하고 은행권에 대한 신뢰가 높지 못했으므로 통화 공급이 원화리 못해 공황이 주기적으로 발생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뱅크 런과 은행 도산 위기가 빈발했고 1873년과 1907년에는 초대형 은행 위기가 발발했습니다. 더 이상 중앙은행이 없어서는 곤란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이처럼 미국의 중앙은행은 빈발하던 금융 위기의 산물이었습니다.

 

연준 설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07년의 은행 위기였습니다. 이 위기는 트러스트(trust)라는 신탁은행(오늘날의 프라이빗 뱅크)의 위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부자들의 재산을 위탁바다 관리 운용하는 트러스트는 당초 맡은 재산을 보수적으로 관리했으나, 20세기 들어 미국 경제가 호황을 맞자 위험이 높은 부동산 시장과 주식시장 투기를 감행했습니다.

그런데 트러스트에는 안전장치가 없었습니다. 당신 연방 인가 은행들은 자율적으로 청산·결제 기구(clearing house)를 만들고 이에 참여한 회원은 은행이 자금난에 처하면 청산·결제 기구가 보증을 서 주는 등의 구제 장치가 있었지만 트러스트는 이러한 안전망에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청산·결재 기구에 참여하면 소정의 지급 준비금을 쌓아야 하는 부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트러스트가 연방 인가 은행과 별 차이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트러스트에 많은 신탁자금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트러스트가 빠르게 성장해서 1907년 뉴욕시 소재 트러스트의 자산규모는 뉴욕시 소재 연방 인가 은행의 자산규모를 넘어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1907년 니커보커(Knickerbocker)라는 뉴욕의 대형 트러스트가 파탄에 처하면서 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니커보커는 주식 트레이더들에게 자금을 빌려 주는 식으로 투기를 감행해 왔는데, 주가 폭락으로 대출 자산이 부실화하면서 예금 인출사태에 봉착했고 연이어 다른 트러스트들도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이때 뉴욕시 청산·결재 기구는 트러스트가 회원사가 아니므로 구제금융을 거부했고, 단 이틀 만에 무려 12개의 대형 트러스트가 파산했습니다. 이로 인해 자금 시장이 얼어붙어 자금난에 처한 주식 트레이더들이 주식을 급매함으로써 주식 시장도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미증유의 사태에서 구세주 역할을 한 것은 당시 월스트리트 은행가 중 맏형 격이던 존 피어폰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이었습니다. 그는 사태를 방치할 경우 건전한 은행들까지도 무사할 수 없다는 판단에 직접사태 진화에 나섰습니다. 모건은 존 록펠러(John D. Rockefeller) 등을 비롯한 다른 유력 은행가 및 사업가, 재무부장관 등과 긴급 회동해 구제 금융을 각출하자고 제안했고 이것이 먹혀들었습니다. 긴급 자금이 수혈되어 지급 준비금이 늘어나자 일주일 만에 예금인출 사태는 진화되었습니다. 

 

이처럼 니커보커 위기는 빠르게 수습되었으나 이미 위기로 인해 주식 시장이 반 토막이 났고 실물 경제에 악영향을 미쳐 이후 4년 동안 미국 경제는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로써 금융위기가 실물 위기로 전화될 경우 고통이 매우 크다는 사실이 재확인되었습니다. 이후 미국 정치권에서는 심각한 논의가 벌어졌습니다. 모건과 같은 한 개인의 영향력에 의존해 위기를 수습한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제도적 공백을 의미하는가라는 반성이 컸습니다. 결국 유사시 유동성을 공급할 수 있는 최종 대부자 역할을 할 중앙은행이 필요하다는 점에 모두가 공감했고 자연스럽게 중앙은행의 설립 추진이 탄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1913년 연준이 창설되었습니다. 중앙은해의 설립은 은행들에게 당근과 채찍을 의미했습니다. 은행들은 지구별로 설치된 12개의 연방준비은행 밑에 들어가 감독을 받아야 했고 적정한 지급 준비 예금을 쌓도록 강제되었습니다. 그리고 유사시에는 연방준비은행으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을 수 있는 혜택이 부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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