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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1부

 

메디치가가 개척한 은행업의 역사는 현대 금융의 맹아가 되었습니다. 이 전통을 이어받은 것은 북유럽의 네덜란드와 스웨덴, 영국이었습니다. 세 나라의 수도인 암스테르담, 스톡홀름, 런던은 17세기에 제각기 금융 중심지로서 발전하면서 획기적인 금융 혁신을 이뤄 냈습니다. 바로 중앙은행의 역사적인 등장입니다. 17세기가 과학혁명의 세기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17세기는 금융 혁신의 세기

 

최초로 1609년 암스테르담에 설립된 비셀방크(Wisselbank)가 창안한 지급 결제의 혁신이 있었습니다. 비셀방크는 당시 여러 나라에서 주조된 온갖주화가 난립해 상거래가 제약된다는 점에 착안해 상인들에게 단일한 통화로 예금 계좌를 개설해 주었습니다. 상인들은 이를 통해 수표를 발행하거나 계좌 이체를 하는 방식으로 지급 결제를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한 금융 혁신이었습니다.

도난의 위험을 무릅쓰고 무거운 주화를 운반한 뒤 주화의 무게를 달고 순도를 측정해 지급 결제를 마무리해야 했던 번거로움을 단번에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비셀방크는 여러 상인에게 예금 계좌를 개설해 주고 계좌 이체라고 하는 훌륭한 지급 결제 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대출 서비스는 일체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비셀방크는 예금 인출에 대비해 100% 지급 준비의 원칙을 고수했기 때문에 대출 여력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비셀방크의 이런 보수적인 태도는 뱅크 런의 가능성을 전면 차단한다는 측면에서는 장점이 있지만, 예금의 일부만을 지급 준비로 남기고 나머지를 적극적으로 대출함으로써 은행의 수익성을 높이고, 동시에 사회 전체적으로 신용을 창출한다는 현대 금융의 관점에서 보면 아직 초보적인 은행업이었습니다.

 

17세기의 두 번째 금융 혁신은 1656년 스톡홀름에 설립된 릭스방켄(Riksbanken)이 주도한 신용 창조의 혁신이었습니다. 릭스방켄은 비셀방크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급 결제 서비스뿐 아니라 대출 업무도 병행했습니다. 대출업무는 100% 지급 준비의 원칙을 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금자들이 동시에 예금을 전액 인출할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므로, 예금의 일부만을 지급 준비로 남기고 나머지를 적극적으로 대출해 은행의 수익성을 높이는 것입니다. 즉 오늘날과 같은 부분 지급 준비의 원리를 따른 것입니다. 이 부분 지급 준비의 원리를 전체 은행권으로 확대하면 예금 통화(신용)가 창조됩니다. 예를 들어 지급 준비율이 10%라고 하면, A 은행은 수취한 예금 100달러에 대해 10달러를 지급 준비로 남기고 나머지 90달러를 대출할 수 있습니다. 이때 A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린 차입자가 90달러를 자신이 거래하는 B 은행에 예치하면, B 은행도 부분 지급 준비의 원리에 따라 9달러를 남기고 81달러를 대출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은행권에 신규 유입된 100달러의 예금은 새로운 예금 90달러, 81달러, 72.9달러, 65.6달러.....를 계속 창출하게 되고, 이들의 합계가 지급 결제에 사용될 수 있는 예금 통화로서 기능을 수행합니다. 

 

 

 

 

 

17세기 세 번째의 금융 혁신은 1694년 런던에 설립된 영국은행(Bank of England)이 국가로부터 은행권의 표준화라는 특권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영국은행은 오늘날 중앙은행의 전범으로 알려져 있지만 처음에는 민간 주식회사 형태로 설립되었습니다. 영국 정부가 영국은행의 설립을 특별인가한 이유는 전비 조달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유럽 대륙의 여러 나라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 루이 14세에 맞서는 9년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해군력 강화 비용을 비롯한 전비를 국채 발행에만 의존해 조달하느라 국가 부채가 누적되어 원리금 지급에 쫓기고 있었습니다. 이에 국채 투자자들에게 국채를 영국은행의 주식과 교환(debt-to-equity-swap)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국채를 영국은행에 떠넘긴 것입니다.

 그 대신에 영국은행에는 은행권(지폐)를 발행할 수 있는 준독점적인 특권을 부여했습니다. 이는 대단히 가치 있는 특권이었습니다. 은행권은 발행한 은행의 입장에서는 부채이지만 이자 지급이 필요 없으며 발행한 은행권에 대해 금과 은의 형태로 100%의 지급준비를 하지 않을 경우에는 막대한 주조 이익이 발생합니다. 즉 지폐를 찍는 데는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데 일단 찍어 내면 공권력에 의해 액면 가치를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므로 지폐를 발행한 영국은행에 저절로 막대한 이익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처럼 영국은행은 설립 당시 오늘날의 중앙은행과 달리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상업은행이었습니다.

단 일반 상업은행과는 다르게 정부의 수입과 지출을 관리하고 유사시 재정을 지원하는 정부의 은행이었습니다.

 

이처럼 북유럽 3국은 지급 결제, 신용 창조, 은행권의 표준화라는 세 가지 금융 혁신을 이뤄 냄으로써 오늘날의 통화 제도 및 중앙은행 제도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상공인들은 은행에 설치된 예금 계좌를 통해 각종 상거래에 따른 지급 결제를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고, 은행들은 부분 지급 준비의 원리에 따라 예금 통화를 창출했으며, 특정 은행이 독점적인 발권 은행의 지위를 확보해 은행권을 단일화, 표준화함으로써 일반에 통용성이 높은 현금 통화를 공급했습니다.

 

스페인의 축복이 저주로

 

북유럽 3국이 금융 혁신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시절, 스페인은 금융 발전이 지체되었습니다. 중남비의 방대한 식민지로부터 막대한 양의 금은이 유입되자 스페인은 횡재의 축복에 안주해 있었습니다. 금은이 쏟아져 들어와 통화량의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었으므로 은행 시스템을 발전시킬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스페인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왕실은 풍부한 금화와 은화의 공급을 믿고 제국주의적 팽창에 열을 올렸씁니다. 그 결과 빚더미에 올라 1557~1696년에 무려 열네 차례에 걸쳐 국가 부도 사태를 맞았습니다. 이로 인해 국가 신용도는 땅에 떨어졌고 이후 스페인은 산업화의 물결에서 낙오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금융의 성패가 나라의 운명을 갈랐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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