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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생태계의 관점에서 은행업 1부

 

글로벌 스탠더드로 수렴화

종래 은행업은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국내 시장이라는 지리적 공간에 국한해 영업을 하던 '로컬(지역) 산업'의 특성이 뚜렷했습니다. 따라서 규제의 틀도 각국 사정에 맞춰 나라별로 달랐습니다. 미국은 대공황기에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구분하는 글래스·스티컬 법이 제정되어 은행이 기업 주식을 대량으로 보유하거나 증권업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것이 금지되어 왔습니다. 반면 독일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자본 시장의 발전이 지체되어 부실기업 혹은 자금난에 처한 기업을 은행이 직접 인수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은행이 기업 주식을 대량 보유하거나 증권업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것이 허용되어 왔습니다. 이처럼 은행이 사업은행업 외에도 증권업을 겸영할 수 있는 것을 가리켜 유니버셜 뱅킹(universal banking)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독일을 비롯한 유럽 대륙국가의 전통을 따른 것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은행이 보험업을 겸하는 것이 일찍이 관행화 했는데, 이를 가리켜 프랑스어로 방카쉬랑스(bancassurance)라고 부릅니다. 일본은 어중간한 형태를 보여 왔습니다. 2차대전 패전 이후 일본은 미군의 점령 통치하에서 은행 개혁을 추진했고 미국식으로 은행이 증권업을 겸영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경제 재건과정에서 전쟁 전의 자이바쓰 체제의 유산이 다시 되살아나 은행이 다수의 기업과 상호 주식 보유 관계를 가지는 게이레쓰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은행이 기업 주식을 보유하는 것이 일부 허용되었습니다. 이처럼 각국의 은행업은 업역에서 상이한 특성을 보여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은행업은 글로벌 산업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자본 이동이 자유화해 국경을 넘고 서비스 무역이 활발해지고 교통과 통신 기술이 발전한 것이 주된 배경입니다. 그런 가운데 은행업의 대형화, 겸업화, 국제화, 민영화가 일종의 글로벌 스탠더드로 등장했습니다. 그 기폭제가 된 것은 1999년 미국이 금융 서비스 현대화법인 그램·리치·블라일리(Gramm-Leach-Bliley) 법을 제정하면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엄격히 구분하는 글래스·스티걸 법을 폐지한 사실입니다. 이에 따라 은행, 증권, 보험업의 칸막이를 허물어 겸염을 두루 허용하는 '유니버셜 뱅킹 + 방카쉬랑스'가 은행업의 새로운 글로벌 스탠더드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은행들도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대외적 개방과 대내적 규제 완화가 빠르게 추진되는 가운데 대형화, 겸업화, 국제화, 민영화를 가치로 대대적으로 개편되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은행은 정부로부터 일일이 창구 지도를 받아 가며 실물 경제를 후방에서 지원하던 산업이었으나, 이제는 관치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판단에 의해 사업을 전개하고 주주에게 높은 이익을 창출해 주어야 하는 사적 영리 조직으로 변신했습니다. 이는 국내 은행들이 치열한 국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시대의 요구에 따른 것입니다.

 

중층적 생태계

이처럼 글로벌화로 인해 각국 은행들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수렵하는 현상이 두드러집니다. 크게는 대형화, 겸업화, 국제화, 민영화라는 은행업의 틀과 전략에서, 작게는 은행의 지배 구조, 경영 시스템, 관리 방식 등에서 수렴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렴화가 진행되는 데는 일정 수준 한계가 있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은행업은 본래 가장 희소한 경영 자원인 자본을 전략적으로 배분한다는 특성을 갖고 있어 국민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과 성공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산업이므로, 시장의 수렴화 압력에도 각국별로 고유한 특성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를 '금융 생태계'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은행의 중요성에 비추어 각국은 다양한 형태와 규모의 예금 취급 기관(크게 보면 모두 은행)들이 상호 공존할 수 있는 금융의 생태계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먼저 미국 은행 산업의 경우, 시티(Citi, Jp 모건체이스(JPMorgan Chase), 뱅크오브아메리카(Bank of America, BOA)가 합계 30%의 사장 점유율을 확보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미국에는 개척 시대부터 작은 마을마다 단일 점포 은행이 설립되어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해왔으며, 이러한 지역 은행의 전통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대행 은행이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현재도 그러합니다. 지역 은행은 한때 3만개나 존재했고, 대형화가 대세인 오늘 날에도 약 8천 개가 남아 있습니다. 대공항 당시 은행의 도덕적 해이는 초래한다는 비판이 있었음에도 미국이 전격적으로 예금 보험 제도를 도입한 것도 이들 소형 지역 은행들이 무더기로 도산하는 사태를 막아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독일의 은행업은 민간 은행, 저축은행, 신용협동조합이라는 3개의 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도이체방크(Deutsche Bank), 코메르츠방크(Commerzbank)와 같은 세계적인 대형 민간 은행이 존재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저축은행(Sparkassen)과 신용협동조합(Volksbanken)의 망이 두텁게 깔려 있습니다. 예금 및 대출 점유율에서 500여개에 달하는 저축은행과 이들의 상부 조직인 12개의 주립 은행(Landesbank)이 무려 50%를 차지하며, 촌락에 소재한 2,000여 개에 달하는 신용협동조합이 25%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에도 1990년대 말 금융 위기의 와중에서 종래의 대형 도시 은행들이 합종연횡해 미쓰비시(UFJ), 미쓰이스미토모 파이낸셜그룹(SMFG), 미즈호파이낸셜그룹(MFG)과 같은 초대형 금융 기관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도쿄나 오사카 등 거대 도시권을 벗어나면 오히려 다양한 형태의 지역 밀착형 금융 기관들이 강세를 보입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60여 개의 지방은행, 40여 개의 제2지방은행, 신용금고, 신용협동조합을 들 수 있는데, 이들 네 종류의 지방 금융기관은 예금 수신고에서 도서 지역의 중·대형 은행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대출에서는 이들의 점유율을 앞섭니다.

 

이처럼 선진 각국이 중층적인 금융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과 달리 우리나라는 대형화가 강도 높게 추진되어 대형 은행 위주로 시장이 분할되어 있습니다. 물론 대형화 체제에 당위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의 금융이 국내적 자금 순환에 국한된 것이었다면, 미래의 금융은 글로벌 자금 순환형으로 바뀌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금융 기관의 대형화가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금융이 사람들의 삶에 꼭 필요한 자본에 대한 접근성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서민 경제와 지역 경제의 활력을 높인다는 차원에서 소액 서민 금융(microcredit)의 제도화를 비롯해 금융 생태계의 중층화를 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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