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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경제학-현대 은행 경영의 딜레마.

 

규제 완화로 인해 은행은 높은 수준의 자유를 구가하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수익성이 높아졌지만, 동시에 은행이 부담하는 위험도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커졌습니다. 이러한 변화에 은행들이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은행들은 체계적인 위험 관리를 목적으로 자산부채관리(ALM) 위원회를 설치하거나 고도의 통계적 위험 관리 기법을 도입하고 준법 감시(compliance) 부서를 확대하는 등 내부 위험 관리 체제를 강화했습니다. 감독기관도 대형 금융 기관에 대해 상시적인 감독 팀을 꾸리며 모니터링을 실시했습니다. 그러나 서브프라임 위기에서 드러났듯이, 오늘날 대형 은행들은 심각한 구조적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은행들이 예전의 은행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특히 대형 은행의 경우 예금을 끌어다 대출해 주는 전통적 상업은행 기능에서 이미 많은 이탈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현대 은행 경영이 본질적으로 딜레마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에서는 자기 자본 규모에 맞게 자산운영의 위험을 낮추라는 감독 당국의 명령에 따라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주주들에게 높은 이익을 자겨다주어야 한다는 자본 시장의 명령에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은행의 건전성 확보를 위해 국제결제은행(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s, BIS)의 자기 자본 비율(capital adequacy ratio) 규제가 국제적으로 투자 등 위험을 수반하는 자산 운용에 대해 위험의 크기에 맞게 자기 자본을 쌓을 것을 요구하는 규제이므로, 이를 맞추려면 은행은 자기 자본규모를 키우거나 혹은 수익성을 희생하더라도 보수적, 위험 회피적으로 자산을 운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감독 당국의 요구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 시장의 주주들이 은행에 압박을 가합니다. 주주는 가장 중요한 이해 당사자로서 위험 대비 수익률을 높여 은행의 주가를 높일 것을 요구 합니다. 주주들은 경영진에 구체적인 요구 혹은 제안을 하는 식으로 발언권(voice option)을 행사하기도 하고,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주식을 팔고 떠나겠다는 이탈권(exit option)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감독 당국은 위험을 줄일 것을 요구하고 주주 집단은 위험 대비 수익률을 높이라는 상층적인 압박을 가하고 있으므로, 은행은 어느 한 쪽만을 따를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여건에서 은행들이 찾아낸 방법이 예대 금리 차에 의존하던 기존의 사업 모델을 버리고 부외 활동을 키워 수수료 수입을 확대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은행은 더 이상 은행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대출은 조성 수수료를 받고 즉각 채권을 매각하면 그만이므로 은행의 자산 운용에서 대출 비중이 줄고 증권 투자의 비중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또 다른 금융 기관이 만든 투자 상품, 보험 상품을 열심히 판매해서 수수료를 챙기므로 은행으로부터 예금이 계속 빠져나갔습니다. 이렇게 안정적이고 낮은 금리의 재원을 잃게 된 은행은 단기 금융 시장에서 시장 금리로 자금을 조달하는 비중을 키웠습니다. 그 결과 은행의 대차대조표에서 기간 불일치(maturity mismatch) 문제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기간 불일치 문제란 단기로 자금을 조달해 중·장기로 운용하는 데 따른 문제입니다.

 

이 구조는 평상시에는 대차대조 표상 자산 면의 투자 수익률이 부채 면의 자본 조달 비용보다 높으므로 안정적으로 이익을 낼 수 있는 구조이지만, 서브프라임 위기처럼 자산 면에서 실시한 대출이나 투자의 가치가 폭락할 경우 은행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국제회계기준(International Financial Reporting Standards, IFRS)이 도입되면서 은행이 종래의 역사적 원가주의를 버리고 시가주의 회계(mark-to-market accountin)로 이행해야 하는 것도 큰 부담입니다. 자산 면에 부실이 발생하게 되면 이를 즉각 시가(時價)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은행의 부실이 외부에 알려지고 단기 금융 시장에서 자금 조달이 어려워집니다. 유동성 위기 상황에서 은행은 보유한 자산을 처분해야 하는데, 자산을 급매할 경우 헐값 매각으로 인해 자본 손실이 발생해 은행의 자본금을 잠식하게 됩니다. 도산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피하려면 서둘러 자본을 확충해야 하는데, 외부로부터 자본 수혈이 여의치 않을 경우 은행은 기존 대출을 회수하거나 신규 대출을 중단합니다. 사정이 이렇게 되면 은행으로부터의 신용 공급에 차질이 빚어져 은행의 위기가 급기야 실물 경제의 위기로 확산·비화합니다. 이것이 바로 서브프라임 위기가 일파만파로 확대된 이유입니다.

 

서브프라임 위기의 배후에는 그림자 뱅킹이 있었다.

은행업의 규제 완화와 위험 추수가 서브 프라임의 위기의 단초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대형 은행만을 짚어 위기의 원인이라고 결론지어서는 안 됩니다. 지난 30여 년에 걸쳐 규제의 사각지대에서 급성장해 온 '그림자 뱅킹(shadow banking)'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그림자 뱅킹이란 투자은행, 헤지 펀드, 사모 펀드 등을 말합니다. 이들이 그림자 뱅킹이라는 불리는 이유는 이들이 수행하는 기능이 전통적인 은행과 본질적으로 차이기 없음에도 단지 예금을 취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부의 규제를 거의 받지 않으며, 또 같은 이유로 정부의 금융 안전망으로부터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은행업이 반드시 예금 취급 기관(상업은행)에 의해서만 수행되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단기로 자금을 빌려 장기로 대출해 주는 금융 중개기관은 어떤 의미에서 은행과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단지 차이는 예금을 수취할 수 있느냐의 여부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헤지 펀드나 투자은행도 단기로 돈을 빌려 중·장기의 증권에 투자했으므로 이들도 단기 재원 조달, 장기 투자 운용을 한다는 점에서 은행업에 종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상업은행에 대해서는 일찍이 엄격한 규제와 안전망이 마련된 반면, 이들 그림자 뱅킹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의 전문성과 명성을 믿고 이들에게 돈을 빌려 주려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덕분에 그림자 뱅킹은 단기자금을 엄청난 규모로 빌려 장기물에 투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국 주택 금융 시장에서 발생한 서브프라임 위기가 걷잡을 수 없는 수준의 세계적 금융 위기로 확대된 것은 이렇게 아무런 규제를 받지 않는 그림자 뱅킹이 레버리지로 동원해 투자 포지션을 막대하게 키운 결과였습니다.

 

 

 

 

 

 

규제가 만능일 수 없는 이유

서브 프라임 위기라는 초대형 금융 위기가 발발한 데는 지난 30여 년에 걸친 금융업의 규제 완화가 그 저변의 조건을 형성했습니다. 특히 은행들이 대형화, 겸업화, 국제화를 시도하고 다양한 부외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수익성이 크게 개선되었으나 은행이 부담하는 리스크 역시 매우 커졌습니다. 이처럼 수익성과 안정성 간에는 상층 관계가 성립합니다. 그렇다면 금융을 디시 규제의 시대로 되돌려야 하는 것인가? 답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규제를 완화해 수익성을 높이면 안정성이 훼손되고, 반대로 안정성을 높이려고 은행을 다시 강한 규제의 끈으로 묶으면 여타 금융기관이 빈 공간을 차지함으로써 은행의 수익성을 압박하게 되고 이로 인해 다른 형태의 은행위기 초래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규제가 만능일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규제를 완화해 은행에 운신의 자유를 제공해야 하는데 이것이 은행의 잠재적 위험을 키우고 시스템 리스크를 높이므로 규제 완화를 할수록 은행에 더 강력한 안전장치를 제공해야 합니다. 은행은 일개 민간 자본이 아니라 경제 전체의 인프라 기능을 수행하므로 은행의 안정성을 도외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더 있습니다. 은행들이 안전망(safetynet)을 믿고 도덕적 해이를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대형 은행일수록 그렇습니다. 대형 은행이 위기에 처하면 국민 경제에 미치는 파장이 워낙 크므로 시장 원칙으로 다스리지 않고 온갖 편법을 동원해서라도 이들을 구제하고 있는데, 이러한 암묵적인 안전장치가 대형 은행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는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대마불사(大馬不死, 대마는 어떻게든 살길이 생기므로 죽지 않는다.)의 문제라고 합니다.

 

 

 

 

 

 

 

대형 은행은 죽을 일이 없다.

앞서 은행이 제도로서 성립하게 된 경제학적 근거로 정보 비대칭성의 문제를 지적한 바 있습니다. 흑자 주체가 적자 주체의 신용 정보를 일일이 분석하려면 비용이 너무 크게 발생해 금융 그 자체가 위축될 수밖에 없으므로 신용 정보의 생산과 관리에 특화해 규모의 경제를 달서하는 은행과 같은 금융 기관이 만들어져 정보의 비대칭성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논리입니다. 이처럼 정보 비대칭성이라는 개념은 은행의 존립 근거를 명쾌하게 제시합니다. 그런데 정보 비대칭성은 은행의 실패를 설명하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은행에 자금을 제공한 예금자 혹은 채권자는 정보 비대칭성으로 인해 은행이 자금을 제대로 운용하고 있는지 세세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은행의 자산이 부실화했다거나 유동성이 부족하다는 시장의 루머를 접하면 과민 반응해 자금을 급속히 회수함으로써 은행의 위기를 재촉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은행과 자금 제공자 간의 정보 비대칭성 문제로 인해 역사적으로 은행의 위기가 수없이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쓰라린 경험을 토대로 위기에 처한 은행에 중앙은행이 긴급히 유동성을 수혈하는 최종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기능이 이미 19세기에 정착했습니다. 또 대공항 이후 미국에서는 1993년 예금 보험 제도가 세계 최초로 도입되었으며, 이후 많은 나라가 정부가 제공하는 금융 안전망의 중요한 축으로 예금 보험제도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최종 대부자 기능, 예금 보험제도와 같은 금융 안전망이 도입되면서 은행이 도산하는 사태는 크게 줄었습니다. 그런데 큰 은행에 대해서는 또 하나의 암묵적인 금융 안전망이 제공되었습니다. 대형 은행이 파산할 경우 사회적, 경제적으로 미칠 파장을 우려해 무조건 살리고 보자는 식의 접근, 즉 대마불사(too-big-to-fail)의 신화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대형 은행에 대해서는 '실패한 자는 퇴출시켜야 한다'는 시장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대형 은행에 자금을 제공한 예금자와 채권자는 은행의 경영을 적극적으로 감시하거나 규율하지 않으며 이로 인해 대형 은행은 무모할 정도로 과감하게 위험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은행이 대형화, 겸업화, 국제화를 추진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대마불사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대형 은행이 증권업, 보험업, 부동산업을 겸업할 경우 이런 금융 안전망이 비은행업에까지 확장되는 셈이며, 은행이 해외로 진출할 경우 정부의 규제 권한이 미치지 못하는 해외 지역에도 안전망이 제공되는 셈입니다. 이런 방대한 암묵의 안전망에 의존할 수 있으므로 은행의 위험 추수는 더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서브프라임 위기 이후 드러난 각국 대형 은행의 위기는 정부의 금융 안전망 뒤에 숨어 있는 대마불사의 문제를 잘 보여 줍니다. 따라서 향후 금융 감독은 어떻게 대형 금융 기관 혹은 '시스템상 중요한 금융 기관(systemically important financial institution, SIFI)'을 효과적으로 감독해 이들의 도덕적 해이를 막을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처럼 금융규제는 할 수도 안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딜레마가 있습니다. 탈규제의 금융은 불안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번영의 메커니즘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경제적 풍요와 번영의 이면에는 자유롭게 창의력을 발휘하고 있는 금유의 막중한 역할이 있습니다. 따러서 탐욕과 오작동을 이유로 금융을 단죄하려는 규제 시도가 자칫 금융의 혁신을 원천적으로 제약하면서 실물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금융의 혁신도 비행기 기술 혁신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비행기는 한번 사고가 발생하면 치사율이 매우 높은 극히 위험한 운송 수단이지만, 비행기가 발전하지 않았다면 인간은 아직도 배를 타고 오랜 향해에 시달리며 이동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비행기 사고가 잦다는 이유로 비행기를 없애거나 못 타게 할 것이 아니라, 비행기의 세부적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사고의 위험을 낮 우어야 합니다. 금융에 있어서도 기술을 부정할 것이 아니라 기술을 보완하려는 접근방식이 필요합니다. 규제가 현실을 따라가기 쉽지 않다는 사실도 규제가 만능 일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금융기관은 현행 규제 틀에서 허점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금융 혁신을 시도합니다. 따라서 금융 규제는 움직이는 표적을 상대로 쥐와 고양이의 게임을 벌여야 합니다. 금융기관은 항상 새로운 방식으로 규제를 우회하므로 감독 당국도 새로운 규제 방식을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처럼 뛰어난 인재들이 모여들어 끊임없이 새로운 혁신을 이뤄내는 금융 시장을 상대로 효과적인 규제를 펼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규제를 논하기에 앞서 감독 가능성을 짚어 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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