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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경제 이야기-메디치 은행의 영리한 사업방식

 

영세한 형태의 대금업 혹은 환전상에서 탈피해 규모의 경제와 리스크의 분신을 도모하면서 제대로 된 은행업을 전개한 것은 14세기 말 피렌체의 메디치 은행(Banco de Medici)이었습니다. 메디치가 역시 은행업의 맹아였다고 볼 수 있는 환전상에서 출발했습니다. 가문을 일으킨 자는 조반의 디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i Bicci de' Medici)였습니다. 그는 1385년 로마에서 교황청을 상대로 환전 업무를 대행하면서 명성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바티칸에는 여러 나라로부터 각양각색의 금화, 은화가 유입, 유출되었으므로, 교황청의 입장에서 환전은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를 기회로 잡아 기반을 형성한 조반니는 교황청 비즈니스 외에도 원거리 무역과 환전업을 접목시켜 사업을 더욱 번창시켰습니다.

조반니는 1397년 고향 피렌체에 은행 본사를 설립했으며, 그의 맏아들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가 1420년 가업을 승계하고 피렌체를 사령탑으로 로마, 베네치아, 제네바, 피사, 런던, 아비뇽 등지에 지점을 개설해 가업의 글로벌화를 주도 했습니다.

무역과 환전을 결합시킨 매체는 환어음(bill of exchange)이었습니다. 환어음은 환전이라는 합법의 틀 내에서 금기였던 대금업을 영위할 수 있도록 허점(loophole)을 찾아낸 획기적인 금융 혁신이었습니다. 즉 환어음은 외견상으로는 지급 결제의 형태를 띠면서도 사실상 대출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당시 이자를 금지하는 사회적 억제를 교묘하게 회피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 상세한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습니다. 환어음은 우리에게 익숙한 약속 어음과는 구조가 다릅니다. 약속 어음은 상품 매입자가 상품 매도자에게 특정 만기까지 지불을 약속하는 양자 간의 증서입니다. 그래서 상품 매입자가 약속 어음의 발행인이며 지급인이다. 환어음은 매도자가 매입자에게 추심을 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래서 매도자가 환어음의 발행인이고 매입자가 지급인입니다. 측 환어음은 매도자가 매입자를 지급인으로 발행한 증서이며, 매입자와 매도자 사이에 은행이 개입해 삼자 관계 속에서 결제가 이뤄집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중동과 아시아 지역으로부터 향신료와 실크를 수입한 피렌체의 한 상인이 이를 다시 런던의 한 상인에게 팔기로 했다고 가정해 봅니다. 문제는 런던 상인이 수입 대금을 정해진 시한까지 결제해야 하는데, 원격지에 거주하는 그가 이러한 의무를 이행할지 미리 파악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은행이 중간에 끼게 됩니다.

 

피렌체 상인은 런던 상인을 지급인으로 환어음을 발행한 후, 이를 메디치 은행에 매각해 현지 통화인 플로린으로 수출 대금을 수령합니다. 이로써 피렌체 상인은 은행의 개입에 의해 런던 수입상이 미처 지급 결제를 하지 않았음에도 수출 대금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메디치 은행은 언제 어떻게 런던 상인으로부터 대금을 회수했을까? 이 환어음에는 지급인인 런던 상인이 메디치 은행 런던 지점에 소정의 파운드를 지급하도록 기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메디치 은행은 런던 지점을 통해 이 환어음을 런던의 상인에게 제시함으로 환어음의 액면에 적힌 파운드 대금을 회수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환시세의 변동에 따라 환위험(foreign exchange risk)이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만얀 메디치 은행이 1000 플로린을 지급하고 200판운드를 수취했다면, 이것은 이종(理種) 통화 거래이므로 환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은행이라면 당연히 리스크에 민감해야 하므로, 메디치 은행은 환위험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고 나름대로 헤지(hedge, 위험 회피) 수단을 개발했습니다.

그것은 런던으로부터 피렌체로 향하는 역방향의 무역 거래를 주선하는 것입니다. 즉 영국에서 면직물을 사서 이탈리아에 수출하고자 하는 런던 상인을 섭외하는 것입니다. 이 런던 상인은 피렌체 상인을 지급인으로 하는 환 어름을 발행하고, 이를 메디치에 매도해 200파운드를 수취하며, 이탈리아 수입상은 환어음에 기재된 대로 메디치에게 1200 플로린을 지급한 후 수입 물품을 인수합니다. 이렇게 되면 메디치 은행은 반대 방향의 두 거래를 통해 환위험을 '헤지' 했을 뿐 아니라 200 플로린의 차익까지 얻을 수 있습니다. 

 

 

 

 

 

교황청은 어떤 노리로 은행업을 승인했나?

이러한 환어음 거래에서 홍미 로운 것은 환전의 이면에 대출이 숨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수출과 동시에 수출상은 대금을 수취하고 수입상은 환어음이 제시될 때까지 대금의 지급을 미룰 수 있기 때문에 수출상과 수입상 모두에게 일종의 대출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문제 때문에 당시의 기독교 신학자라들은 환 어름 거래를 대금업으로 볼지 아닐지를 두고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마침내 로마 교회는 환어음은 어디까지나 원격지 무역의 지급 결제를 위한 수단으로써 환위험을 수반하므로 고리대금과 무관하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이후 환 어름이 활발하게 사용됨으로써 유럽 전역을 잇는 원거리 교역이 활성화되어었으며 그 덕분에 은행업은 더욱 융성해졌습니다. 이처럼 은행업이 대금업에 대한 증세의 속박에서 벗어나 흥하게 된 데는 다시 최고의 권위인 교황청에 의해 합법적인 경제 행위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은행업의 중심에 메디치가가 있었습니다. 이들을 빼고서 르네상스 시대를 거론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가문의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메디치는 두 명의 교황을 배출했고 정략결혼으로 프랑스 왕비도 두 명 냈습니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갈릴레오(Galileo) 등 예술가와 과학자 들을 후원했으며, 토스카나, 피렌체, 느무르 등지에 이들이 남긴 뛰어난 건축물들은 오늘날 관광 명소가 되었습니다. 메디치가의 역사를 최초로 기록한 것도 당대 최대의 정치 이론가였던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였습니다. 

 

그렇다고 메디치가가 정경 유착에만 의존해 은행을 키운 것은 아녔습니다. 메디치가는 은행업에 수반되는 막대한 위험을 분산하려면 사업 규모를 키우고 거점과 영역을 다변화해야 하며 리스크 관리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점이 샤일록과 메디치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메디치는 여러 곳으로 지점망을 넓혀 사업의 규모를 키움과 동시에 위험이 집중되는 것을 막았고, 각 지점에 사업 자율권과 이윤 배분권을 부여하는 식으로 책임 경영도 실시했습니다.

또 오늘날만큼 정교하지는 못하더라도 복식 부기의 원리를 도입해, 장부의 왼편에 자금의 운용으로서 대출과 (사실상의 대출인) 환어음 거래를 기록하고, 오른편에는 자금의 조달로서 예금을 기재했습니다. 이처럼 고도의 은행 경영 기법을 창출하고 시행한 것이 메디치가가 큰돈을 벌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은행업의 본질은 무엇인가?

중세의 은행이 교황청으로부터 사회적 권위를 부여받아 발전했듯이, 오늘날의 은행은 국가 권력으로부터 예금을 수취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는다. 예금을 수취한다는 것은 불특정 다수로부터 낮은 이자율로 자금을 모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특권입니다. 따라서 은행업을 영위하는 허가를 가리켜 차터(charter) 또는 프랜차이즈(franchise)라고 하며, 각국 정부는 이러한 특권을 가지는 은행의 설립을 엄격한 심사를 통해 인가합니다. 그렇다고 은행만이 예금 수취의 특권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각국에는 은행 외에도 다양한 예금 수취 기관들이 존재합니다.

한 예로 미국에는 주택 금융에 전력해 온 저축대부조합(savings & loans association, S&L)이 있고 영국에도 주택금융조합(building society)이 있습니다. 유럽 각국에는 협동조합 은행과 저축은행이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고, 일본에는 최근 민영화 조치로 큰 관심을 끌고 있는 우체국이 중요한 저축 기관입니다. 이처럼 각국에는 다양한 형태의 은행 및 은행 유사 기관이 존재하면서 일종의 '금융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글로벌화로 인행 금융의 수렴화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각국의 고유한 특성은 여전히 뚜렷합니다. 어떤 고객을 주로 상대하는가를 기준으로 은행업을 구분하기도 합니다. 개인이나 자영업자, 중소기업을 상대로 하는 은행업을 가리켜 소매 금융(retail banking)이라고 부르고, 대기업이나 정부 기관 및 여타 금융 기관을 상대로 하는 은행업을 가리켜 도매 금융(wholesale banking)이라고 부릅니다. 한편 소매금융 중에서도 금융 자산을 많이 보유한 부유층(high net worth individual)에 중점을 두는 것을 개인 금융(private banking)이라고 하며, 도매 금융 중에서도 대기업 고객에 초점을 맞춘 것을 기업 금융(corporate banking)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은행업에는 다양한 영역이 있습니다.

 

그러나 은행 비즈니스의 구조는 간단합니다. 은행은 예금으로 자금을 조달하고 대출로 자금을 운영하는데, 통상 예금 이자에 비해 대출 이자가 높으므로 양 이자의 차이인 예대 금리차(net interest margin, NIM)가 발생해 은행의 주된 수익원이 됩니다. 예금 이자가 낮은 이유는 은행에 돈을 맡겨 안전하게 보관해 주는 서비스와, 예금을 마치 현금과 같이 지급 결제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서비스가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한편 대출이자 높은 까닭은 차입자가 원금과 이자를 갚지 못할 수 있므로, 차입자의 신용도에 맞춰 위험 프리미엄을 부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은행은 차입자의 채무 불이행(default)에 따른 대출 손실(loan loss, '대손')이 예대 금리 차 이익에서 경상 운영비를 차감한 영업 이익(operating income)의 수준을 초과할 정도로 커지지 않는 한 안정적으로 돈벌이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은행의 자산 규모가 1000억 원인데 모두 대출로 구성되어 있으며 재원 중 900억 원은 예금으로, 나머지 100억 원은 자기 자본으로 조달했다고 합시다. 은행의 예금 금리가 평균 4%이고 대출금리가 평균 6%라면, 이 은행은 예대금리 차에 의해 24억 원(1000억*6%-900억*4%)의 수익이 발생하며, 지점 조직과 인력, IT 인프라를 유지하기 위해 총자산의 1%에 해당하는 10억 원의 경상 운영비가 발생한다면 이 은행의 영업 이익은 14억 원입니다. 그런데 은행의 대출 자산이 부실화해 자산의 1.4%가 대손으로 처리될 경우 이 은행의 영업 이익은 모두 잠식되어 버리며 대손 비율이 1.4%를 상회할 경우에는 자본금까지 잠식됩니다. 이렇게 보면 은행에 있어서 신용 위험(credit risk)의 관리는 생명선과도 같은 것이며, 대손을 낮게 유지해야만 은행이 안정적으로 이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금을 받아 대출을 하되 신용 위험을 적극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것이 은행업의 본질입니다. 이런 본질적 특성에서는 오늘날의 은행도 옛날의 환전상이나 금은 세공업자와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중요한 차이는 현대 은행의 경유 규모의 경제를 살리고 위험의 분산을 추구함과 동시에 리스크의 관리를 고도화해 왔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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