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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경제 제대로 알기-샤일록은 왜 은행을 키우지 못했을까?

 

월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명작 《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은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픽션이긴 하지만 배경이 된 14세기경의 대금업 실상이 비교적 상세히 그려져 있습니다. 이야기의 도입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사는 젊은이 바사니 오는 부유한 집안의 딸과 결혼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돈을 필요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돈을 꿔 주려 하지 않습니다. 하는 수 없이 가까운 친구 안토니오에게 부탁해 샤일록으로부터 돈을 빌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샤일록은 대출 금리를 높게 부르는 것 외에도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담보로 요구합니다.

이것은 사실상 안토니오의 목숨을 담보로 요구한 것과 같습니다. 안토니오는 북아프리카, 인도, 멕시코 등지를 상대로 원격지 무역을 하던 사업가였는데, 샤일록은 무역의 리스크가 워낙 커 원리금 변제를 못할 수 있으므로 목숨을 거는 방식의 강력한 담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면 샤일록은 왜 그토록 극악무도한 방식으로 대금업을 벌인 것일까? 그 첫째 이유는 샤일록이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 천대받던 유대계 소수자였다는 점입니다. 중세 시대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자를 받는 대금업을 엄격하게 금지했습니다. 대금 행위가 발각되면 즉각 파문되었고 대금업을 비호하는 발언도 금기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에게는 예외가 허용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성전인 구약성경에 "너의 형제에게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 줘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방인에게는 가능하다."라는 문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대인인 상호 간에는 대금업이 불가능해도 기독교인에게 돈을 빌려 주는 것은 가능했습니다. 이처럼 중세 시대 유대인은 대금업을 합법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 대신 사회적으로 무시와 홀대를 당해야 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당시 금융의 발전이 워낙 지체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금업자들은 리스크가 높다는 이유로 고리를 부과했고, 고리가 부과될수록 채무 불이행의 가능성이 더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담보로 잡는 식의 혹독한 거래 관행이 성리 했습니다. 그 결과 대차 거래에 분쟁이 발생하면 피를 부르는 폭력 사건으로 비화하기도 했습니다. 법원이 중재에 나서기도 했지만 소수자 신분이던 유대인 대금업자들은 다수자인 기독교인들에게 돈을 떼 먹히기 십상이었고 법원의 판결도 매우 편파적이었습니다.

샤일록 이야기는 흔히 인간의 탐욕을 묘사한 작품을 잘 알려져 있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원시적인 대금업의 한계를 표한 것이기도 합니다. 대금업은 매우 영세했고 고객 집단도 다변화되어 있지 못했습니다. 이른바 포트폴리오의 분산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리스크가 매우 높아 대금업자들은 높은 이자를 요구하는 것 외에도 원리금 회수를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대금업자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빗발쳤고 사회적 소수자였던 유대인은 더욱 궁지에 몰렸습니다. 이러한 초창기 대금업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규모의 경제와 위험 분산을 시도한 근대적 은행업이 탄생하면서부터였습니다. 도대체 금기의 대상이었던 은행업은 어떻게 억압에서 벗어나 사회적 권위를 인정받고 합법화한 것일까>

 

고리대금업 이자 계산의 비밀(금융 경제학)

약탈적인 고금리로 돈을 빌려준 후 가혹한 방식으로 수금을 악덕 고리대금업은 샤일록 시절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존재합니다. 샤일록이 목숨을 담보로 요구했다면 오늘날의 대금업자는 끝없이 독촉 전화를 걸거나 수시로 방문해 일상을 괴롭히다 못해 심지어는 조폭까지 고용해 협박을 가하는 방식으로 수금을 합니다. 물론 법으로 대부이자의 상한이 66%로 정해져 있어 이를 초과하는 고리대금은 원칙적으로 불법이지만, 여전히 연리 100%가 넘는 고리대금이 버젓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고리대금을 이용하는 이들은 크게 두 부류입니다. 한 부류는 반복되는 연체로 인해 신용 부적격 판정을 받고 더 이상 제도 금융권에서 돈을 빌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다른 대안이 없어 고리대금을 사용합니다. 또 다른 부류는 이자율 계산에 익숙지 못해 자신이 빌리는 자금이 얼마나 고리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흔히 고리대금업자는 "급전 1,000만 원까지 무담보 즉시 대출 가능, 1주일에 이자 2%"라는 식의 전단을 뿌린다. 은행 대출 이자가 6~8%인데 급전 이자율이 2%라고 하니 혹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자 기간의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고리대금업자가 1주일에 2%라는 실효 이자를 받는다는 것은 1년, 즉 52주를 기준으로 하면 104%의 연 이자가 발생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즉 고리대금업자는 "1주일 이자 104%"라고 전단에 표시해야 하는데 이를 2%라고 적어 사람들을 호도한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금융 감독 당국은 모든 이자율은 이자 기간에 관계없이 1년을 기준으로 연율로 표시하도록 강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고리대금업자는 대출 기간 동안에 발생하는 실효 금리를 그대로 전단에 기재함으로써 사람들을 현혹한다. 게다닥 단리가 아니라 복리로 이자 계산을 할 경우에는 발생하는 이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1주일 실효 금리가 2%이고, 일주일 간격으로 복리를 적용하는 고리대금을 끌어다 쓰고 1년 후에 원리금을 상환한다고 합시다. 그 원리금의 합계는 '원금 ×(1+0.02) 52으로 원금의 2.8배가 된다. 무려 180%의 이자가 발생되는 것입니다.

 

 

이탈리아 북부에서 발흥한 환전업

흔히 은 해업은 이자 수취가 가능했던 유대인들에 의해 대대손손 이어져 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영위한 대금업은 샤일록의 비극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극히 영세한 가업의 형태에 불과했습니다. 은행업을 개시한 것은 이탈리아 북부의 환전상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인 신분이었지만 기독교 율법을 우회하는 방법을 썼습니다. 그러면 왜 하필 이탈리아 북부였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13세기 초 십자군 원정 이후 중동과 아시아 지역을 연결하는 동방 무역의 활로가 열리면서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무역 상권을 놓고 베네치아, 피렌체, 제노바 등 도시 국가들이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상거래는 비약적으로 팽창했는데, 숫자 체계에 여전히 로마 숫자(i, ii, iii, iv---)에 머물러 있어 계산이 매우 불편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은 피사에 살던 젊은 수학자 레어나르도 피보나치(Leonardo Fibonacci)였습니다. 그는 「계산 방법론(Liber Abaci」(1202)이란 책을 저술하고 아라비아 숫자와 십진법, 분수 계산을 최초로 서구에 소개했습니다. 그 덕분에 환전과 이자 계산이 쉬워졌고 상업 부기의 맹아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피보나치의 고향인 피사와 인근의 피렌체에 환전상이 모여들었고 금융업이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피렌체의 환전상에게는 유럽 각지에서 주조된 여러 가지 금화와 은화가 몰려들었습니다. 환전상의 주된 일은 오늘날의 외환 중재가 그러하듯이 다양한 주화를 즉석에서 교환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금화와 은화를 보관해 주면서 예탁 증서를 발행하기도 했는데, 이 예탁 증서가 의외로 편리하다는 사실이 금방 입증되었습니다. 당시 상인들은 지급 결제를 위해 금화나 은화를 직접 짊어지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도난과 분실의 위험이 높았고, 안전을 위해 호위병을 붙일 경우에는 부대 비용이 적잖이 발생했습니다. 상황이 이러했기에 환전상이 보관증으로 발행한 예탁 증서가 마치 오늘날의 지폐와 같이 지금 결제 수단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주화를 보관하는 사례가 점점 늘어 가는 가운데 환전상들은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주화를 맡긴 자들은 예탁증서만 가지고도 상거래의 결제가 가능하므로 구태여 주화를 찾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를 경험적으로 터득한 환전상들은 보관 중인 주화를 다른 사람에게 대출해 줌으로써 이자 수입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이를테면 예금으로 자금을 조달하고 그 자금을 대출해서 운영하는 은행업의 기본이 시작된 것입니다. 물론 르네상스기에도 중세 시대와 마찬가지로 이자 취득을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여전히 강했지만, 환전상들은 환전이라는 외양을 지키면서 대출업을 은밀하게 영위함으로써 오늘날의 은행처럼 이자 수입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은행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반코(banco)'도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환전상들이 깔아 놓던 좌판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이탈리아에서 환전상들이 은행업을 태동시켰다면, 영국에서는 금은 세공업자(goldsmith)들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금은 세공업의 주된 일은 귀금속을 다듬는 것이지만, 보조적으로 금화나 은화를 보관해 주는 일을 병행했습니다.

 

사람들은 침대 밑에 금은보화를 감춰 두기보다는 튼튼한 금고를 비치한 금은 세공업자에게 맡기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화 보관업을 겸하게 된 금은 세공업자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금화와 은화를 그대로 묵히기보다는 이자를 받고 대출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금화와 은화를 맡긴 자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찾아가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이른바 큰 수의 법칙(law of large numbers) 또는 평균의 법칙에 의해, 맡겨진 금화와 은화의 일부만을 지급 준비용으로 남기고 나머지를 대출로 운영해도 예탁자의 인출 요구에 무리 없이 대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급 준비'라고 하는 오늘날 은행업의 기본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 큰수의 법칙 

모집단의 크기가 작을 경우에는 평균을 계산해도 그 평균이 모집단이 특성을 잘 반영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모집단의 크기가 충분히 크면 평균값이 모집단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즉 개개의 현상에서는 공통된 특성이나 상호 연관성을 발견하기 힘들더라도 여러 번 관찰하고 관찰 횟수가 거듭될수록 일정한 경향이나 규칙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수 법칙이라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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